자기 앞의 생
내 인생은 돌아보면 참으로 힘겹고 고단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늘이었다.
나는 유대인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나를 짐짝처럼 다뤘고, 나는 나치 치하의 수용소에 갇혀 인간도 아닌 존재로 살았다. 살아있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시간들이었다.
겨우 목숨을 건져 나왔을 땐,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설 자리는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이 낡은 몸뚱이 하나. 가진 게 몸이면 몸을 팔 수밖에 없었다.
젊었던 나는 예뻤고, 건강했고, 살아있었다. 나를 찾는 손님들이 있었고, 지폐가 손에 쥐어졌고, 그걸로 배를 채웠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굶는 것보단 나았다. 누구도 나를 먹여주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괜찮았던 시절이었다니, 세상 참 아이러니다.
오십이 넘자, 내 몸도 더 이상 팔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몸들, 내 동료들이 낳은 아이들을 맡아 기르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일하면서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 세상은 창녀에게 아이를 허락하지 않으니까.
가난했고, 불규칙했고, 때로는 돈조차 보내지 못했지만, 나는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나의 품을 거쳐갔고, 입양되거나, 때때로 친부모에게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모모, 그 아이는 달랐다.
그 애는... 내게 들어올 때부터 눈빛이 맑고 깊었다. 나는 유대인이고, 그는 아랍계다. 나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 거리에는 아프리카 흑인도, 인도 사람도, 프랑스의 가난뱅이도 산다. 세상에 문제 아닌 게 어디 있나.
모모는 나에게 특별한 아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가 너무 빨리 자라는 것이 싫었다.
내 곁에, 언제까지나 내 아이로 남아주기를 바랐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 사랑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구해 온 ‘무언가’를 닮아 있었다.
모모는 엄마를 모른다. 아예 기억조차 없다.
버려진 아이는 사랑을 모른다. 아니, 모르기 때문에 더 갈구한다.
벽에 똥칠을 하기도 하고, 괜히 반항하고, 말썽도 부렸다. 그 모든 것이 사랑받고 싶은 몸부림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암사자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그때부터 그는 밤마다 암사자를 불러들였다.
정글의 법칙은 잔인하다. 하지만 암사자는 새끼를 위해 죽음을 택한다.
모모의 암사자는, 그 아이를 꿈속에서 지켜준다.
그게 나일까? 아니면 그가 그리는 엄마의 얼굴일까?
나는 모모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온다. 그걸로 충분하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귀한 일인가.
하밀 할아버지를 잘 따르고, 그에게 글자를 배우고 삶의 지혜를 얻는 걸 보면, 마음이 놓인다.
나도 하밀을 좋아한다. 말이 많지 않고, 존중을 안다. 요즘 그런 사람 드물다.
내 주변엔 그런 좋은 이들이 많다. 다들 어렵게 살고 있지만 우린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으로 대했다. 의사 선생 카츠는 인간적인 사람이다. 내 아픈 몸을 진심으로 걱정해 준다.
5층에 사는 룰라는 참 고마운 동생이다. 여장 남자로 몸 파는 일을 하지만, 씩씩하고 명랑하다. 모모를 잘 돌봐주고, 나를 웃게 만든다. 그 웃음이, 요즘 내겐 참 귀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점점 무너진다. 들어오는 돈은 없고, 몸은 부서져간다.
고통이 나를 휘감는다. 숨 쉬는 것조차 두렵다.
어떤 날은, 수용소의 기억이 덮쳐온다. 불빛도, 사람 소리도, 바람조차 사라진 감옥.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몸을 움츠리고, 내 안의 동굴로 기어든다.
유대인의 동굴. 그곳은 어둡고, 외롭고, 조용하다. 하지만 유일하게 안전한 곳이다.
나는 그 속에서 조금씩 사라져 간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이제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숨이 짧고, 눈이 감기고, 몸이 점점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병원 침대 위에서, 하얀 시트에 싸여 연명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살아온 방식대로, 이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고 싶다.
조용히, 존엄하게, 내가 선택한 자리에서.
모모는 내 마음을 안다.
그 애는 내 말을 듣고, 나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사랑이란, 그렇게 자리를 바꿔가며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우린 서로에게 그 사랑의 증인이 되었다.
나는 세상의 바닥, 어둡고 버려진 지하 공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모모는 그 어둠 속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한때 내가 아이들을 감싸던 그 자리에서, 이제는 모모가 나를 감싸주었다.
그 애가 내 곁에 있어 다행이었다.
그 애가 나의 마지막을 지켜봐 줘서, 나는 무섭지 않았다.
나는 모모가 나 없이도 잘 살아가길 바란다.
단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잘 살아가길.
그 아이가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그 애 앞에 놓인 생을 사랑으로 채우길.
사랑하고, 배워가고, 누군가에게 따뜻한 존재가 되기를.
내 죽음이 들통난 뒤, 나딘에게 연락이 닿았다는 건 다행이다.
모모는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아직 그를 붙잡아줄 어른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린다. 이제 나는 평안히 안식의 강을 건넌다.
"미토르니히 조르겐.” 유태어를 모를까 봐 말해주겠는데, 그건 ‘세상을 원망할 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세상을 원망할 건 없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