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집_11
일본 생활 중 있었던 일이다. 당시 살았던 월세집의 계약연장 시기가 도래했지만 나는 새 보증인을 구하지 못했다. (당시 외국인이 집을 계약하기 위해서는 보증회사나 현지인의 보증인이 필요했다) 한 번은 보증회사에 돈을 내고, 한 번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의 점장님이 보증을 서주었지만, 갱신 때마다 들어가는 돈과 서류 준비 큰 스트레스였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보증회사에 내는 돈만큼 큰 부담 또한 없었다. 게다가 외국인 신분이었던 내 보증인이 되어주려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서류와 개인정보를 제출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보증금 없이 들어갈 수 있는 한국인 운영 원룸텔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 집은 니시신주쿠의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번화가가 아니라 조용했지만, 외진 골목이라 늦은 저녁에는 가끔 무섭기도 했다. 골목에는 오래된 맨션이나 버려진 듯 보이는 폐가가 있었고, 작은 회사들이 중간중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집을 선택한 건 무엇보다도 학교와 가까웠고, 공용공간 이외에는 개인공간이 보장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원룸텔이라기보다 한국의 고시원 같은 형태의 집이었지만, 근처에 편의점과 슈퍼마켓도 있었고 역도 가까웠다. 한인타운과도 가까워 필요한 물품 또한 언제든 구입할 수 있었다.
4층 건물의 3층.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1-2층은 회사로 이용되고 있었고, 3-4층은 한국인 주인이 구조를 변경해서 원룸텔로 사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작은 주방과 길게 뻗은 복도가 있었다. 복도를 기준으로 양쪽에 열댓 개의 방이 있었다. 주방과 샤워부스, 화장실은 공용이었다. 다행히 방마다 에어컨과 티브이, 옷장, 책상, 나무로 만든 침대가 있었다. 월 5만 5천엔. 전기세를 제외한 공과금은 포함. 학생인 내게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 금액으로는 신주쿠인근에서는 제대로 된 방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적당한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나의 미래가 어찌 될지 아무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학교 통학과 아르바이트를 하기 편한 지역으로 가자는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집에 있는 시간 또한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잠만 편하게 잘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살던 집에서 사용하던 작은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를 가지고 올 수 있어서 생활하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여성 전용이었고 한국인이 많이 거주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 집에 익숙해질 때쯤 그 일은 터졌다.
알바를 가기 위해 출근 준비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처음으로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혹시나 티브이 소리가 컸나 싶어 당황해 문을 연 순간 그곳에는 낯선 남자들이 있었다. 검은 바바리코트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천연파마인지 일부러 한 건지 모르겠자만 잘 말린 파마를 한 두 중년의 남자. 여성 전용이라 관리인 외에는 남자라고는 볼 수 없는 공간에 그 남자들은 무단으로 들어와서 방마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남자라는 사실에도 일차로 놀랐지만, 그보다 더 긴장했던 건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야쿠자였다.
그들은 처음 듣는 말투로 원룸텔의 운영자가 빌린 돈을 갚지 않아 찾고 있다고 했다. 만약 찾지 못한다면 이 집에서 더 이상 지내지 못할 거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운영자의 행방을 묻는 그들에게 나는 줄 답 없었다. 운영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한국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월세도 관리인에게 매달 전달했으며, 집을 구할 때 외에는 연락할 일이 없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그들은 험악한 얼굴로 다음 방의 문을 두드리러 갔다. 일본에서 지낸 지 꽤 흘렀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류의 사람들을 내 방문 앞에서 만날 줄이야. 정말 만화 같은 일이구나 싶으면서도 그들이 뿜어내는 분위기에 나는 압도되었다. 나는 그들의 노크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방에서 나가지 못한 채 숨죽이며 그들이 돌아가기만 기다렸다.
그날 이후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늘어났다. 같은 일을 겪으면 자연스럽게 연대감이 생긴다. 같은 층의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불안에 서로 상황과 의견을 공유해야 했고, 연락되지 않는 운영자를 대신해 관리자에게 상황을 공유받아야 했었다. 이럴 때일수록 동포애가 끓어오르는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관리인을 통해 운영자에게 상황전달과 함께 해결책을 요구했고, 겸사겸사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전달했다. 우리는 서로 어색했던 사이에서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고, 쉬는 날이면 공용 주방에서 파전을 부쳐 함께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다행히 그날 이후로도 야쿠자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잠깐의 해프닝 같은 일이 사람들을 뭉치게 했다. 같은 일을 겪는다는 것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