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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래너앤라이터 Oct 08. 2024

# 1. 혼돈의 홀로서기

두울, 서울 아가씨를 만나다.


# 1. 혼돈의 홀로서기


정직원이 되고 첫 월급을 받기 전에 나는 이모집을 나왔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이모가 내가 살 곳을 알아봐 줬다. 내가 살 곳인데 살 동네와 살 집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서울 물정을 모르는 내가 걱정되신 부모님은 이모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모가 계약한 집으로 들어가 살 수밖에 없었다. 살고 있는 집을 제외한 부모님이 가진 전 재산으로 추정되는 돈이 서울살이를 시작한 아들의 전세금으로 빠져나갔다. 노후 대책이 전혀 없는 부모님이 걱정됐지만 도움을 받지 않고는 방법이 없었다.


내가 이사 갈 집은 이모집에서 머지않은 곳에 위치한 원룸 오피스텔이었다. 그 당시 나는 부동산 시세나 계약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기에 가격이 적절한지 따져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모의 연락을 받고 처음으로 내가 살 집을 가봤다.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방 한 칸에 싱크대가 붙어 있고 조그만 화장실이 딸려있는 4평 정도 되는 원룸이었다. 세탁기가 들어갈 곳이 없어서 복도에 공용 세탁기가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가까운 것 빼고는 장점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중복도 형식의 배치로 양 옆과 앞으로 원룸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방안에 가만히 있으면 온갖 소음이 다 들렸다. 창문을 열면 바로 시장이라 하루 종일 생활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세탁기는 늘 대기줄이 늘어져 있었고, 외출 시 빨래가 발목을 잡기도 했다. 지금에서야 그 집이 원룸보다는 고시원에 가깝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서울 한복판에 등 대고 누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서울은 나에게 동경의 도시였고 희망의 도시였기에 서울에서 일하며 살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모든 것이 그렇듯 어색했던 서울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회사 일도 손에 익으면서 점점 직장인의 모습으로 굳혀 갔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서울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세련된 서울말을 흉내 내며 서울 사람 마냥 변해갔다. 적지만 정직원의 월급을 받으며 신용카드도 만들고 사회 초년생들이 흔히 가입하는 보험도 가입했다. 모든 게 안정되어 가는 듯 보였다.


서울에 온 지 1년쯤 지나서 친한 친구들이 하나씩 서울로 취업해서 올라왔다. 먼저 자리 잡은 나는 서울 생활 선배로서 친구들이 자리 잡을 때까지 술도 사고 밥도 샀다. 친구들이 조금씩 생활이 안정되어 가면서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났다. 피 끓는 청춘들이 만나하는 일이라곤 늘 같았지만 만날 때마다 즐거웠다. 서울에 현란한 밤은 촌놈들에게 늘 새로웠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곳은 다 돌아다녔다. 십시일반 한다고 해도 매주 음주가무를 하려면 꽤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중 대기업을 다니는 친구가 있어서 많은 신세를 졌지만 나의 쥐꼬리만 한 월급도 모조리 유흥비로 사라졌다. 직장 생활 2년 차까지 내 통장은 늘 텅장이었다.


빈 통장을 볼 때마다 앞으로의 인생이 보이지 않았다. 반성을 통해 저축도 하고 미래를 계획하겠다는 다짐은 빈 통장을 만났을 때뿐이었다. 다시 월급이 들어와 통장이 채워지면 유흥 생활이 반복되었다. 외출을 줄여보고자 컴퓨터까지 거금을 들여 장만했다. 당초 계획은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집에서 게임을 즐기려고 했지만 한 달을 넘기기 힘들었다. 서울에 친구라곤 몇 명 없는데 그나마 멀어지는 게 두려웠다. 주말은 다시 친구들과 즐겼고 평일은 밤새워 게임하며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월급은 조금씩 올랐는데 돈은 전혀 모이지 않았다. 매달 돈이 궁했고 결국 마이너스 통장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내 돈처럼 쓰다 보니 마이너스 한도까지 지출이 늘어났고, 평일에도 친구들을 만나 술에 취해 살았다. 회사에 지각하는 날도 늘어났고 내 삶을 자책하는 날이 많았다. 내 인생은 그렇게 계속 꼬여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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