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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생계형 야근하지 말고 아이들과 놀아주세요.

네엣, 득녀로 100점이 되다.

by 플래너앤라이터

# 2. 생계형 야근하지 말고 아이들과 놀아주세요.


어린 시절 넥타이를 매고 반듯한 정장을 입은 아빠를 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런 아빠를 둔 친구집에 가면 장난감도 많았고 최신 게임기도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매일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가게로 출근하셨다. 땀을 흘리며 힘들게 몸을 쓰는 일을 하셨다. 우리 집에는 장난감도 게임기도 없었다. 아버지가 입는 옷으로 빈부의 차이를 느꼈다. 우리 아버지가 넥타이에 반듯한 양복을 입은 회사원이었으면 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멋져 보이고 돈도 많이 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토록 바랬던 넥타이를 맨 회사원이 됐다. 그러나 어릴 적 내가 생각했던 그런 부자의 삶은 아니었다.


아들이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면 가격표부터 봤고 가격표를 보고 나면 선뜻 장난감을 사줄 수 없었다. 어릴 적 봤던 친구의 아버지는 아마도 회사의 사장이었을 것이다. 월급쟁이였다면 친구의 집이 90평에다가 자신의 방에는 장난감과 게임기로 가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나의 현실을 보면 그렇게 믿고 싶다. 미래 가치가 없는 외곽지역의 25평 아파트, 아들이 원하는 장난감을 한 번도 속 시원하게 사주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고는 회사원이 된 것을 후회했다.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취업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찾았더라면,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둘째가 태어나고 돈에 대한 강박과 집착은 더 심해졌다. 그럴수록 지금 순간을 살지 못하고 미래 어딘가에 있을 행복을 바라며 현재를 죽이며 살게 됐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돈이 없어서 지금은 안돼"였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있지도 않은 미래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삶에서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할리가 없었다. 현재의 시간은 나중을 위해 돈을 벌어야 되고 희생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어리석게도 모멘토 모리를 잊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덫에 제대로 걸려든 인생이었다.


아내는 나와는 달랐다. 돈 보다 현재의 삶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한 집의 가장이 돈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는 상황에서 평화를 지키고 싶었던 아내는 전면전을 피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취업을 시도했다. 둘째가 태어난 지 10개월 되던 때였다. 아내가 취업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는 죄책감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경력이 단절된 지 오래되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것이었다. 조금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이 텔레마케터 일이었다. 이것저것 따지기에는 마음이 급했던 아내는 텔레마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육아까지 병행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있었지만 텔레마케터라는 직업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엄청 심한 일이었다.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정신병에 걸릴 거 같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계속 다니라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텔레마케터를 그만둔 이후에도 아내는 쉴 수가 없었다. 일을 하면서 늘어난 벌이에 생활이 길들여져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그만큼의 벌이를 해야만 했다. 아내는 육아를 하면서 틈틈이 보육교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보육교사가 돼서 우리 아이들을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며 옆에서 일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결국 아내는 바라던 보육교사가 되었고 우리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 졸업을 하고도 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생각보다 보수적이다. 돈을 벌어 오는 아내가 좋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싫었다.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림을 하는 가정주부로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바짝 벌어서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그 당시 내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아서 아내가 일을 시작한 터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은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마음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삶은 더 윤기를 잃고 메말라 갔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 어렸을 때 다양한 추억이 없다.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서 흙수저 직장인이 월급만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서 저축을 하더라도 겨우 먹고 살 정도이다. 모아둔 월급에다 대출을 이용해서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를 잘하거나 아니면 별도의 사업체를 가지고 개인 사업을 해야 어느 정도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자본주의 덫에 제대로 걸린 나는 갈 길이 멀었다. 어딘가에 있을 먼 미래의 행복에 닿으려면 한참을 더 벌어야 했다. 아마 평생을 일해도 먼 미래의 행복을 손으로 움켜쥐지 못할 것이다. 현재를 살지 못했던 나는 사랑하는 가족과의 소중한 추억을 쌓지 못했다. 모든 추억은 나중에 있었다.


맞벌이를 시작하면서 돈벌이에 박차를 가했다. 나는 매일 새벽에 출근해서 잠을 자는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 팀원 모두가 퇴근해도 나는 매일 야근을 했다. 일이 있어서 야근을 했다기보다 돈을 벌기 위해 야근을 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서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렇게 사는 삶이 행복할리가 없었다. 일을 하지 않는 야근이라도 회사에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고 체력적 부담이었다. 매일 저녁 10시가 되어야 나는 집으로 출발했고 집에 오면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은 다 잠들어 있었고 홀로 깡소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겨우 살아내는 삶이었다.


퇴근하고 아이들을 안고 웃고 떠들며 함께 식사도 하고 같이 잠드는 그런 일상의 행복을 몰랐다.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그런 것들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의 소중한 시간은 매정하게 흘렀고 다시는 그런 시간이 돌아오지 않았다. 15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이 훌쩍 커버리니 거꾸로 아이들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려 한다. 현재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던 나의 청춘, 나의 젊은 아빠시절이 뼈저리게 후회된다. 후회를 한다고 돌이킬 수 없는 것, 돈으로도 절대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았다.


삶에 나중은 없다. 삶은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면서 점점 후회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즉 쓸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고작 떠오르는 것들은 암울했던 나의 마음들이었다.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글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더 이상 쓰기가 힘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고 한 글자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 브런치 북인데 중도 포기로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았다. 시작을 했으니 끝은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나의 암울했던 과거는 좋지 않은 삶의 예시로 나름의 교훈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쓰고 있다. 쓰면서 암울했던 과거의 나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나아진 삶에 감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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