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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Apr 27. 2024

첫째는 우산, 둘째는 부채, 셋째는 수박을 판다

4월, 학부모 상담과 학부모 참관수업이 끝나고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건 어떤 걸까? 내가 낳은 아기를 눈앞에 두고 마냥 신비했다. 신비의 내용 중 하나는 도통 모르겠는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겉모습은 보는 바와 같고, 유전자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남편의 조합임이 분명한데, 이 아기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라면 아는 바가 0이었다.


속싸개에 꽁꽁 싸여 신생아실에 조로록 누운 아기들을 두고, 어른들은 고작 머리카락 숱을 가지고 뭔가 아는 척을 했다. 산부인과에서나 산후조리원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둘째, 셋째 때 모두 한결같았다. 곧이어 아기가 얼마나 젖을 잘 먹는지, 그리고 몸무게가 얼마나 잘 느는지를 가지고 한 인간의 명운이 달린 것처럼 논했다. 별반 다르지 않게 말을 보태면서도, 이게 얼마나 허무한 일이며 맹랑한 일인지 감이 왔다.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그다음엔, 뒤집기와 기기, 잡고 서기와 걷기를 언제 하는지에 대해, 잠투정이 얼마나 심하며 성질이 얼마나 고약한지에 대해, 언제 어떻게 울고 웃는지에 대해, 얼마나 기가 막힌 말과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말할 것이었다. 한 인간에 대해 알게 된 것처럼, 아는 것처럼, 알 것처럼.





놀이터나 병원이나 도서관에서 또래의 아이를 만나면 월령을 짐작하거나 물었다. 이래저래 관찰하며 내 아이의 발달상황을 확인했다. 키와 몸무게, 어휘와 발음, 눈맞춤이나 의사소통으로 알 수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수준, 손으로 발로 할 수 있는 일, 대범함과 소심함. 스캔하듯 성적표를 매기고는 진정한 의문의 승패로 나아갔다.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아이의 담임선생님과 상담할 때, 나는 온몸이 귀가 된 것처럼 얌전히 앉아서 선생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떨어뜨릴까 마음에 담고 가슴에 새겼다. 아이는 때에 따라, 선생님에 따라 굉장한 아이도 되었다가, 세상 걱정스런 아이가 되기도 했다. 모두 상담의 현장보다는 내 머리와 마음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피아노학원에 보내고 몇 개월인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원장님이 퇴근하면서 전화를 걸었다. 나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작은방에 뛰어들어가 문을 닫고 귀를 기울였다. 피아노와 음악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첫째의 재능을 상찬하는 말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어머니, OO이가 특별한 아이인 거 아시죠.




키우는 내내 듣고 싶던 말을 들었던 것이다. 잠깐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몸이 붕 떠올랐다. 이 내가, 김연아는 못됐지만 김연아 엄마가 되는 것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지... 생각도 얼마나 쉽게 날아오르던지. 하지만 거짓이라기보다 진심이 몇 방울쯤 담긴 말이 얼마나 기댈 것이 못되는 형체 없는 것인지는, 말하며 사는 인간인 나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친정엄마는 내가 내 아이에 대해 자랑 혹은 걱정의 말을 할라치면, 애는 크면서 별의별 짓을 다하니 내 아이에 대해서도, 남의 애에 대해서도 뭐라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나는 괜히 김이 샜다. 그럼에도, 이만큼 살면서 보고 겪은 사람들 몇만 훑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정말로 아이들은 별의별 짓을 다했고, 오만 가지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너무나 다방면의, 너무나 여러 층위의 방대한 정보로서, 성적표든 그래프든 정량적 평가로 치환 가능한 무엇이 아니었다. 더구나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는, 여전히 만들어지는 중인 아이는 하나의 통일된 개체로 이해하는 것조차 물음표를 군데군데 붙여놓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식의 평가든) '평가'라는 것은 번짓수도 한참이나 틀린 일이었고, 아무리 부모라도 인간의 분수에 영 못 미치는 일이었다. 이해와 파악, 수용과 납득 언저리에서 얼쩡대다 얻어걸리면 다행한 일이었다. 점점 남의 말은, 그게 설령 담임선생님의 말이어도 어느 무게 이상은 갖지 못했다. 나의 세 아이들을 두고 끊임없이 의아해하다 사소한 깨우침에 놀라느라 언젠가부터 남의 아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4월 초엔 학부모 상담이 있었고, 지난주엔 학부모 참관수업에 다녀왔다. 어느덧 학부모로서 선생님과의 상담도 서른 번쯤 했나. 나는 바짝 긴장했던 몇 년 전과 달리, 잠깐, 파바밧, 빠짝 머릿속을 훑어 꼭 해야 할 말이 있나 찾은 다음... 낮잠을 잔 후 상쾌한 정신으로 집을 나섰다.


초등학생 시절의 담임선생님은 아무래도 아이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고, 10-20분 간의 짧은, 단번의 만남에서는 내용뿐 아니라 말의 순서나 인상도 사사롭게 넘길 수 없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어디까지나 그냥 인사를 드리겠다는 마음이었다.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며 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그게 관계의 시작이니까.)


아이에 대해 내가 전혀 모르는 사실을,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안목을 접하리라는 기대 같은 건 거의 없었다. 이 분은 아이의 이런 면을 이렇게 보시는구나,에 가까웠다. 그 때문에 내가 붕 뜨거나 촥 가라앉을 일도 아니었다.


나는 좀 과했나 싶을 정도로 캐주얼하게 시간을 보내고 나와, 남편에게 대화를 간추려 전했다. 살짝 흥분한 채로 자주 웃었는데, 한 인간에 대해, 내 아이에 대해 퍼즐을 맞춰가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비교우위'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글쎄, 엄밀히 따지자면 타인 혹은 일반의 아이들과 '비교'를 한 것이고, 그에 대해 '우위'가 있는 부분이 내용이 된 것이겠지만, 어디까지나 객관화의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의 차원이었달까?


장기하가 '부럽지가 않어'에서 노래했듯, 세상에는 천만 원 가진 사람도 있고 억만금을 가진 사람도 있는데, 백만 원 가진 내가 십만 원 가진 사람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끼고 우쭐해져봐야 몇 초짜리다. 그리고 돈은 돈이고, 돈이 아닌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주만큼 그 존재는 확실하고 구체적으로는 도통 모르겠는 것들 때문에, 어느 쪽으로든 '한 개도 부럽지가 않'았다. 머리 빼고 속싸개에 싸여 있다고, 눈도 감고 자고만 있다고, 머리숱 말고는 차이 나는 게 없다고, 머리숱을 중요하게 여길 필요는 없으니까.


학부모 참관수업은 꽤 재미있었지만, 엄청 기가 빨렸다. 한 공간에 서로를 의식하는 개체의 수가 너무 많았다. 메타 인지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되느라, 참관자이자 내 아이와 상호작용하는 주인공으로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매우 바빴다.


게다가 세 아이가 한 학교에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해로서, 2교시엔 첫째와 둘째의 수업에, 3교시엔 첫째와 셋째의 수업에 가야 했다. 남편과 반반씩 왔다갔다 했는데, 그것도 욕심 혹은 열심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첫째는 또박또박 발표를 잘했고, 둘째는 차분히 앉아 있다가 우리말이 서투른 옆자리 아이를 도와주었다. 셋째는 조금은 부산하고 적당히 야무지고 확실히 명랑했다. 나는 첫째를 보다 보면 어떤 마음이 차올라서 둘째 셋째에게는 그에 대해서는 바라는 마음이 없어지고, 둘째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그걸로 충분해서 첫째 셋째에게까지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셋째는 뭐랄까...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고 잘 크고 있으니... 다 괜찮은 것 같다.


생각 많고 불안 쩌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자식이 셋이나 있어서, 오늘은 이 아이 보고 감사하고 내일은 저 아이 보며 감사하다. 꽤 괜찮은 것 같다.


 

교실에 붙어 있던 셋째의 그림. 게시판 제목은 <나의 고민은>. 그래, 그런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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