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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Apr 29. 2024

너라는 사건, 너라는 흔적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도, 삶의 많은 걸 바꿀 수 있어도

세상은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질로, '실체'로, '현재에 있는' 무엇인가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 혹은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적 발생으로, 과정으로, '발생하는' 그 무엇인가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 무엇은 지속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영속적이지 않다. 기초 물리학에서 시간 개념의 파괴는 두 가지 관점 중 첫 번째 관점이 붕괴된 것이지 두 번째는 아니다. 변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의 안정성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일시성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니라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시간을 갖는 것이다. '사물'의 전형은 돌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105-106쪽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는 이후 매우 중요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 결과는 언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또한 과거와 미래의 차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흔적은 곳곳에 있다. 달 위의 분화구들은 과거에 충격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화석은 과거 생명체의 형태를 보여준다. 망원경은 멀리 있는 은하들의 과거 상태를 나타낸다. 책을 보면 우리의 지난 역사를 알 수 있고 우리의 뇌는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173쪽

ㅡ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중에서



영화 <어바웃 타임>을 처음 봤을 때 첫째가 세 살이었다. (남자 주인공이 벽장 같은 곳에 들어가 주먹을 꽉 쥐면 원하는 과거로 갈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유쾌하게 보았다. 그렇게 보다 보면, <러브 액츄얼리>나 <노팅힐> 같은 감독의 전작들처럼, 훈훈한 감동과 함께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영화는 과연 그러했고, 몇몇 장면, 어떤 에피소드, 곳곳에 깔린 크고 작은 메시지는, 왜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흥행했나 의아할 정도로 정말 멋졌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한 장면과 이어지는 전개에 반해 지금까지도 때때로 곱씹는다.


주인공 팀은 과거로 돌아가 여동생 킷캣의 꼬인 인생의 원인을 없애준다. 그리고 현재로 돌아왔더니 자신의 아이가 바뀌어 있다. 그는 온몸으로 경악한다.


나는 첫째를 떠올리고, 순식간에 이 영화가 얼마나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팀은 허둥지둥 아버지를 찾아가서 묻는다. 자신과 같은 초능력자인 아버지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 타이밍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려준다. 팀은 원래의 아이로 되돌려놓기 위해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고 성공하고 안도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똑같은 배우자와의 자식, 그러니까 유전적으로는 선호를 따질 이유가 없는 아이라 해도, 이미 내 아이였던 존재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첫째가 아닌 다른 아이와 지내는 삶을 떠올려보고는, 팀에게 동의했다.


어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있던 아이와 바꿀 만큼의 가치가 안 될까? 그래서 팀과 그의 아버지처럼, 아마도 그의 모든 조상들처럼, 아무리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도, 삶의 많은 걸 바꿀 수 있어도, 자식이 태어나기 전으로는 안 돌아갈까?


나는 우울해질 때마다, 인생 전체가 후회되고 개탄스러울 때마다 벽장같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두 주먹을 쥐고 생각하곤 했다.





후회한다는 건 복기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나은 결과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혜롭고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반응이자 행동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일이란 없고, 후회하는 중에도 시간은 '흘러가기' 때문에, 후회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어리석고 삶을 방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전자든 후자든 이런 식의 생각은 사실 전혀 소용이 없다. 그냥 나는 후회를 많이 한다. 영화가 내게 잊지 못할 순간을 안겨줬다면, 팀이 딸 포지가 아닌 처음 보는 아들을 어색하게 안은 채로 경악할 때, 그 짧은 순간 이전의 모든 인생은 바꿀 수 있는 대상에서 완벽하게 지웠듯이,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초라하고 서글픈 유년시절, 지울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부모, 깡그리 잊고 싶은 사건, 희미한 채로 나를 옭아매는 가지 않은 길, 나에게 없던 것 혹은 없었으면 했던 것, 내가 취하지 못한 것 혹은 내가 잘못 취한 것. 그 모든 것들을 그냥 두어야 했다. 지금의 나와 이 아이가 만나야 하니까.


아이를 낳은 일이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잘한 거라 말하는 것은 나의 어떤 자아를 몸서리 치게 하지만, 그 자아조차 만약 팀의 초능력을 손에 쥔다면, 아이들이 존재하기 전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내 삶에서 없애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죽음을 미룰 수 있다 해도. (어떤 부와 명예, 권력을 얻을 수 있다 해도...라고까지는 못하겠다. 내 상상력이 조금 의심스럽긴 해서. 불확실하고 희미한 어떤 것에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을 만큼, 정도로 해두자.)


아이들과 마주하는 순간은, 엄마와 자식이라는 인연으로 엮여 함께 별별 일을 겪고 오만 가지 감정을 느끼는 삶은, 내 모든 지난 삶의 사건이 만든 결과이고 흔적이자, 앞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은 사건이고 흔적이다.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우울하거나 갑갑하고 두려운 때에도, 가만히 나를 붙들고 다음으로 넘어가게 해주는 힘이 생긴다.



뭘 해도 재밌었어.




* <육아의 순간들> 연재를 마칩니다. 엄마로만 산 12년을 정리했으니... 이제 다른 국면의 삶을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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