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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11시간전

12주. 꿈은 으레 착각

오랜만에 달리기 때문에 깊고 길고 거대한 꿈을 꾸었나 보다.

요 며칠 달리기는 못하고(부상과 기력 상실, 여행과 여독), 마라톤 대회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현재까지 런데이 온라인 마라톤 포함 4개 마라톤 대회를 신청한 상태인데, 신청 취소나 종목 변경 가능한 기한이 코앞이었다. 내가 그 대회, 그 종목에 참여할 수 있을까? 내 실력이 넘칠까, 모자랄까? 도통 감을 잠을 수 없었다.


내 몸 상태와 달리기 현황에 따라, 신청할 때의 결정은 과욕을 부린 것이 되기도 했고, 소심한 것이 되기도 했다. 신청할 때 현 상태와 앞으로 성장가능성에 대해 나름 합리적으로 숙고하여 결정했는데도, 나의 달리기 성장은 (지금까지 글에 썼듯이) 예상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4분 이상 달리는 게 힘들어서 제일 처음 신청했던 10월 10km 마라톤이 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고, 천천히 달리기로 이전보다 길게 달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10월 10km 정도는 잘하면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차곡차곡 거리도 늘고, 페이스도 좋아지자 10월 10km가 아쉬워졌다. 하프로 바꿀까?


그리고 열흘 전 과한 운동에 따른 불상사. 갑자기 달릴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고 보니, 상향조정했던 예상 성장곡선은 허공에서 지워졌다. 속상함이나 씁쓸함은 뒤로 하고... 마라톤 경기 같은 건 다 취소하고 아예 관심 끌까? 안정적이고 보수적으로 목표를 잡고 경험 삼아 한두 개만 참여할까? 실패한다 하더라도 일단 신청한 건 도전해볼까? 각각 다른 시기의, 들쑥날쑥 다르게 가능성을 점친,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는 4개의 패를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머릿속은 조용히 바빴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5km를 달리는 날이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도전이 이제 나의 발아래 펼쳐지는 순간이다.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가운데, 첫발을 내디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5km는 내게 거대한 장벽과 같았다. 사실 5km가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중략)
 5km 지점을 통과했다. 심장이 펄떡펄떡 요동쳤다. '나는 5km를 뛸 수 있는 사람이구나.' 좀처럼 흥분의 여진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보고 싶었다. (중략)
나의 첫 5km는 '5km 이전의 나'와 '5km 이후의 나'로 구분 짓는 기준선이 되었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젖혀주었다.

ㅡ이재진, <마라닉 페이스>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갑자기, 어쩌면 문제는 속상함이나 씁쓸함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현실과 달랐던 일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런 것에 다친 마음을 부여잡고 있어봤자 달라질 일도 없다. 그러니 마음 같은 건 훌훌 털어버리고, 당장 실제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안에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마땅해 보였는데, 가만 보니 그거야말로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었다. 부딪혀보고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지나가고, 과욕으로 판명되어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면 포기하고 넘어가면 된다. 지금 아무리 고민해봤자, 지금까지처럼 알아맞힐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대비인 건 매한가지니까.


하지만 꿈은 갑자기 꾸어지는 게 아니다. 어떤 기준선을 지나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리면, 그로부터 펼쳐지는 세계가 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형상이기도 하고, 끝이 있거나 없는 길이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그려지지 않기에 육감이나 직관으로 다가오는 취한 기분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탄탄한 몸과 건강한 얼굴빛으로 달리는 내 모습이라든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주름살과 백발을 뚫고 나오는 정정한 기운과 활력 같은 것, 어디를 어떤 이유로 가든 달리는 내 발로 만나는 땅이나 달리기가 아니면 접점이 없을 귀한 친구들, 혹은 42.195km라는 무의미할 수도 있는 상징을 나와 결부시키는 순간, 무엇보다 계절과 나이를, 내 몸 바깥의 시간과 내 몸 안의 시간의 변화를 달리면서 거친 들숨날숨과 뛰는 심장으로 동기화하는 것 등등. 나는 알게 모르게 그런 꿈을 꾸었나 보다.


실제로 달려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들을 겪을 때마다, 그런 꿈은 눈앞에서 흐려지기도 하고, 반대로 색과 냄새가 또렷해지기도 했다. 살이 붙기도 하고, 구겨져 폐기 처분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세상이 장밋빛으로 물들고 인생은 살 만한 것이 되었다가, 마구 열심을 낼 수도 없는 몸이나 마음대로 쉬이 되는 일 없는 세상이 너무 시시해서 정이 떨어지기도 했다.


삶이 내내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새로운 학교에 진학하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취직이나 이직을 할 때마다, 새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관계에 접어들 때마다, 소풍을 기다리고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어떤 가능성이 열리고 이전에 몰랐던, 닿은 적 없던 나와 삶에 대해 꿈꾸게 된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꿈과 현실은 '틀린 그림 찾기'가 아니라 '같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할 만큼 판이하게 달랐다.


설레는 마음으로 꿈을 꾸고, 꿈과는 다른 현실을 마주하고, 꾸었던 꿈을 실망 속에 잊어버리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 되어서, 꿈조차 꾸지 않는 삶이 되어버렸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현실이라, 그렇게 허망해진 꿈들을 자꾸만 맞이하는 일은 참말로 무용하고 피곤하니까. 나는 나를 지키고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오랜만에 달리기 때문에 깊고 길고 거대한 꿈을 꾸었나 보다. 몸이 달라지고, 마음도 달라지고, 그래서 일상이 달라지는 것을 보아하니, 인생도 달라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루어지지 못할 꿈을 꾼 대가는 여전히 달갑지 않고 버거웠으니, 허황한 꿈을 꾸는 버릇 같은 건 이제 그만두자고 애써 무덤덤하고 밋밋하게 넘어가는 중이었다.


지난주 친정엄마와 언니랑 난생처음 셋만의 여행을 갔는데 반은 냉전 상태로 보냈고, 다녀와서는 남편과 결혼 이후 최고로 세게 싸웠다. 한편으론 탈진할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사뭇 담담했다. 이 두 마음이 다 그럴듯했고, 그래서 의아했다.


나는 여행을 준비하며 한 달 동안 품었던 다정한 꿈을 떠올렸고, 남편과 오래 사귀며 점점 단단해졌던 사랑스런 꿈을 기억했다. 그런 꿈들이 환상이며 착각인 것으로 드러나서 슬프고 괴로운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꿈과 꿈을 꾸던 시간이 무의미하거나 무용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꿈은,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나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꿈을 꾸는 바로 그때가 진짜니까. 어떤 현실과 별개로 어떤 현실은 그것으로 살았다.


맥주는 물론 맛있다. 그러나 현실의 맥주는 달리면서 절실하게 상상했던 맥주만큼 맛있지는 않다.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ㅡ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달리기를 하면서 꾸었던 꿈들을 살펴본다.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아마도 현실에서 착각으로 드러날, 환상일 뿐일 꿈. 꿈과 현실의 차이, 그 괴리, 환상과 착각에 불과했다는 자각이 (아무리 익숙해졌다 한들) 속상하고 씁쓸하지 않을 리 없지만, 나로서는 자연스레 꾸어지는 꿈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게다가, 이 세상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 수 있나. 이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산다는 게 뭔지 헷갈린 지도 오래다. 확실히, 열심히 살수록, 진심일수록 절실하게 꿈꾸지 않나. 그러니 실망도 진할 수밖에. 마음껏 속상해하고 씁쓸해한 다음, 내 발이 맞닥뜨린 현실의 나름 괜찮음도 알아봐주겠다.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지만, 어쨌거나 짜릿한 건 현실이니까.




요약

달리기 성장곡선은 예상대로 펼쳐지지 않을 수 있다. 한편, 실제로 달려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들도 있다.



덥거나 습하거나, 이런 하늘인걸.


한 주를 고스란히 쉬고, 어제 드디어 달릴 수 있었다. 길에서 마주친 아주머니가, "화이팅! 대단해요!"라고 외쳐주었다. 몰랐던 짜릿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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