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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너그러워진다

두 발이 동시에 공중에 있으면 됨

by 모도 헤도헨

내가 달리기를 하면서 달려나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몸이 만들어진다 싶을 때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생각으로 가속페달을 밟은 적도 있고, '성장은 한계의 순간부터 비로소'라는 인생 경험을 붙들고 힘들 때 오히려 애써 나아간 적도 있었다.


(웃긴 건, 이게 억지로 정색하고 비장하게 그런 게 아니라, 달리기가 너무 좋고 재미있어서 방방 뛰며 그랬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결과는 참담하게도, 부상과 몸살이었다(4주. 무릎과 욕망, 11주. 실수와 좌절로 점철된). 나는 2보 전진하려다 10보 후퇴하는 일을 두 번이나 겪고 크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엔 하고 싶다고 해도 안 되는 일, 열심히 하면 더 안 되는 일이 있군.


전자는 이제 와 안 것은 아니었다. 마흔이 넘게 살면서 왜 몰랐겠는가? 그리고 후자도 아예 모른 건 아니었다. 육아를 하면서 날마다 물음표 찍으며 (눈물도 찍고) 새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건 '체득'이었다. 한번 '아하!' 하고 깨닫는 건, 심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이치가 내 발목을 잡은 경우가 (아주 열심히 해서 성취한 일만큼이나) 더러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악기를 하나쯤 그럴듯하게 연주하는 사람이 되고픈 꿈을 꽤 오래, 진지하게 가졌는데, 서너 가지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게 내 음악적 재능이나 열망의 문제가 아니라(그렇기도 하겠지만) 은근과 끈기의 문제라는 걸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 이런 거구나! 이렇게 소리가 나고, 코드는 이러하고, 주법은 이런 게 있고...' 그렇게 경쾌하고 빠르게 스타트를 끊고는 그다음은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번번이 주저앉았다.


이론은 깨닫거나 말거나, 진득하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하고 하고 또 하는 사람만이 가닿을 수 있는 경지는 언제나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한편으로 말할 수 없이 속상하면서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어떤 인간도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듯이 아마도 내 것이 아닌 거겠지, 하고 떨떠름하게 손을 털곤 했다.


달리기가 만약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면 나는 아마 진작에 튕겨져 나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작하면서 입문자로서 초보자로서 배울 게 있고, 끝에는 완성의 순간 혹은 완성태라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어서, 그사이엔 완성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언제까지일지 모르고 반복 훈련을 해내야 하는 일.


올림픽 출전이나 40대 여자 세계신기록 같은 정도가 아니라면, 달리기에 어떤 목적지가 있을까? 하기야 개인 기록에 대한 욕심(아니면 적어도 기록을 신경 쓰는 마음), 매일 어느 정도 달리겠다는 의지는 달리기를 처음 할 때부터 때때로 두더지처럼 고개를 내밀긴 했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사로잡힌 적이 없다.


안 되는 것이다. 안 될 일인 것이다. 여기엔 문장의 생김새나 풍기는 냄새와는 다르게 절망이나 슬픔의 낌새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체념, 그것도 사전적 의미 두 번째('도리를 깨닫는 마음')의 체념에서 나오는 단단한 평정심이라 하겠다.


나는 달릴 수 있을 만큼만 달린다.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다.) 그만큼만 해도 완성이며 완전하고 완벽하다. (원래 달리기라는 게 아무 기준이 없다. 두 발이 동시에 지면 위에 떠 있기만 하면 된다.) 하다 보면 나아질 것이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일이 없으니까.) 심지어 달리는 동안 너무 좋다. (결과를 위해 견디고 해내야 하는 훈련이라는, 극기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더구나 이에 대해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다. (뭐라 하지도 않는다. 내 일일 뿐이라.)


그러니 나는 달리기를 하면서 자꾸만 너그러워진다. 그럼, 원래 몸이 그런 거야. 힘든 일이고 말고! 이 정도만 달려도 훌륭해. 한다는 게 중요하지. 달리는 모든 순간 즐기자. 마치는 걸로 완성이잖아.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앞을 보고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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