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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맛의 참맛_춘천연합마라톤_하프

이 꼴이 뭐람.

by 모도 헤도헨

시작하자마자 급 내리막길이었다. 100미터도 가지 않아 끝났지만, 이런 식의 내리막길은 달갑지가 않았다. 왜냐면 나는 반환점을 돌아 이 길을 다시 올 거니까. 막판에 이 길을 거꾸로 올라와야 한다는 거니까. 쉬운 거, 편한 거, 싼 거... 좋다고 좋은 게 아니다.


이후로 반환점까지 내내 오르막이었다. 완만한 오르막이, 가끔 평지를 건드리고 주욱 이어졌다. 나는 이미 야무진 마음을 먹었기에 불평하지 않고 차근차근 달렸다. 그다지 부하가 걸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됐다. 좋아, 반환점까지만 잘 가면 되겠어.


2주 전의 철원마라톤을 떠올렸다. 평균 심박수 179bpm으로 두 시간 넘도록 달렸던,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턱밑에서 숨이 깔딱댔던,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뻗어버렸던. 그사이 두 차례 3-4킬로쯤 겨우 달린 게 다지만, 2주 전의 바로 그 달리기가 훈련이 되어주었을 거라 믿(고 싶)었다. 게다가 그날은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아래였고, 오늘은 구름이 담요처럼 덮인 날이었다. 그러니, 이래저래 지난번과 같은 고생과 최저 기록은 면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지난번 (하프)마라톤 후 왼쪽 골반이 삐끗한 건지 뻐근하여 며칠 고생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졌고, 무엇보다 달리다 보면 오히려 괜찮았기 때문에 별일 없을 거라 믿(고 싶)었다. 아무리 가벼운 부상도 가벼이 볼 게 아니란 걸, 짧은 달리기 인생 경험으로 알면서도 그랬다.


처음 반은 힘들지도 쉽지도 않았다. 지난번처럼 완주를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서린 긴장도 없었고, 기록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어딘가 엉성해진 태세 틈으로, 춘천이란 도시를 향한 여러 가지 마음과 이 마라톤 프로젝트에 대한 만감의 교차, 마흔 중반줄에 대학원에 들어가 오랜만에 아등바등 애써보는 삶에 대한 소회 등 온갖 것이 솟아났다 흩어졌다. 경치나 함께 뛰는 사람들은 심상하게 지나갔다.


드디어 반환점이 나타났다. 나는 에너지젤을 꿀떡꿀떡 삼키고는 속도를 냈다. 완만한 내리막을 내달리며 사람들을 몇몇 제쳤다. 가자, 집에 빨리 가자. 다행이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12킬로미터쯤에서 왼쪽 골반에 신호가 왔다. 뻐근하다 싶더니 점점 묵직하게 아팠고, 이내 뚝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안 되는데, 아ㅡ 안 돼, 하면서도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아니, 속도를 줄인 적이 없는데 속도가 안 났다. 내가 제쳤던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갔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성실하게 발을 굴렸다. 그런데 몸이 자꾸 왼쪽으로 돌았다. 마치 왼쪽으로 기울어진 길을 달리는 것처럼, 오른발 두 개로 달리는 것처럼. 나는 너무 이상해서 자꾸 고개를 숙이고 나의 두 다리와 두 발을 봤다. 내가 내딛으려는 만큼 왼발이 나아가지 못하고 땅에 닿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이 더 많이 지나갔다.


15킬로쯤 되니, 이제는 확실히 통증으로 인식됐고, 왼쪽 발목도 불편했다. 오른쪽의 보폭도 같이 줄었다. 나는 달리면서 왼쪽 엉덩이를 주먹으로 탕탕 치기도 하고 열심히 주무르기도 했다. 이제 주위는 한산해졌다. 속도를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겨우겨우 나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게 보였다.


18킬로쯤부터는 중간중간 걸어야 했다. 걸으며 엉덩이를 한참 주무르고 고관절을 돌리는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뛰었다. 그랬는데도 점점 뛰는 시간과 거리가 줄었다. 힘든 게 아니라 뛸 수가 없었다. 뛰어지지가 않았다.


20킬로 즈음, 나는 뛸 때도 걸을 때도 절뚝이고 있었다. 이제는 걷는 것도 멈추고 근육을 풀어줘야 했고, 그렇게 한참을 쉬고 다시 뛰는데도 열 발자국을 못 갔다. 그렇게 마지막 1킬로미터를, 때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1킬로미터였으나 지금은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거리를, 기는 것처럼 나아갔다.


"파스 필요해요?", "괜찮아요?" 주로를 지키는 안내요원들이 내게 말을 건넸다. 심심치 않게 지나가는 구급차가 나를 보고 멈추면 어쩌나 싶어서, 플래카드를 들고 열심히 응원하는 춘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다 왔다"고, "화이팅"이라고 소리를 높여줄 때마다, 주자들을 찍는 카메라가 보여서, 그 순간만큼은 있는 힘을 다해 뛰려고 했다. 그게 다였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왼쪽 골반이 한 걸음 디딜 때마다 꽉 막혀서, 몇 걸음 못 가 결국 다시 멈춰서야 했다.


그렇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막판에 얼마 안 남은 힘을 쥐어짜서 스퍼트를 하기도 했고, 숨막힌다는 느낌으로 끝까지 달려낸 적도 있고, 나를 기다리는 남편이나 아이들 향해 손을 들고 활짝 웃으며 결승선을 지나기도 했다. 그런데 결승선을 겨우겨우 뛰는 모양새로 지나는 순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온몸이 울컥했다.


소리 나지 않게 훌쩍거리면서, 티 나지 않게 절룩거리면서 물을 받아 근처에 앉았다. 마침 비가 쏟아졌다. 부슬비가 아니라 우다다다 내리는 비를 피하지도 못하고 맞으면서 처량 맞은 내 신세를 잠깐 한탄했다. 이 꼴이 뭐람...


한참 비를 맞으며 앉은 채로 대충 사진을 찍고, 걸어지는가 확인 후 셔틀버스를 타고 경춘선을 타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씻고, 요기를 하고, 다시 택시를 불러서 시외버스를 타고 내가 사는 지역으로 왔다. 시외버스터미널로 마중나온 남편에게 절뚝거리며 다가갔더니 그가 허허 웃는다.


ㅡ나: 내가 까딱하면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서 따뜻한 차를 마셔야겠어.


찻집에 앉아 내 고난과 굴욕의 달리기 여정을 풀어놓았더니, 그가 눈으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ㅡ나: 사실 내 상황이나 훈련 정도를 생각한다면 달리지 않는 게 맞지. 나도 알아.

ㅡ남: 그치. 나라면 포기했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하지.

ㅡ나: 그래도 나는 3보 전진하려다 1보만 전진한 거 같은데? 난 이게 더 좋은데? 아니, 1보 후퇴했다 하더라도 아무 일도 없는 거보다 그게 더 좋을 거 같은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알아듣기를 사양했다.





그날부터 연휴 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왜 울었을까? 왜 눈물이 났을까? 그 눈물의 의미가 뭐였지? 눈물도 눈물이지만, 달리고 나서 그런 느낌이 든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끝나는 순간 "으아~~~!!!!" 하는 포효가 나올 듯한 내적 쾌감에 휩싸였었다. 헉헉대면서도, 바닥에 널브러져서도 말이다.


슬펐나? 부끄러웠나? 아쉬웠나? 아니면 너무 힘들어서? 생각하다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쓴맛이었다. 쓴맛을 본 것이다. 웃을 수 없는, 잘해냈다고 뿌듯해할 수 없는. 졌지만 잘 싸운 게 아니라, 완전히 패했고 후드려 맞았지만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남은 나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연민의 마음을 마주하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무리인 걸 뻔히 알면서도 마라톤을 강행하고, 굳이 쓴맛을 봐야 했을까? 이 정도의 부상이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온 국민의 성원을 받는 국가대항전도 아니고 완주메달 말고는 걸린 것도 없건만, 기어이 쓴맛까지 가야 했을까?


그런 자아비판을 해본다. 하지만 후회는 아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서가 아니라(난 후회대마왕이다), 지나고 보니 왠지 짜릿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달리기, 끝냈을 때 온몸으로 느낀 쓴맛은 절대 잊힐 것 같지가 않다. 두고두고 곱씹을 것 같은, 그래도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조촐하고 궁상맞은 사건이었다.



그 유명한 '춘마'가 위시리스트에 있던 적도 있었으나, 이제 그런 마음은 별로 없다. 같은 날 열린 국제평화마라톤에도 당첨되어서 꽃놀이패 쥔 듯 고민하다 춘천연합마라톤으로. 목요일마다 춘천에 가게 되었으니 동선상, 그리고 1회 마라톤의 싱그러움을 기대하며. 강을 끼고 달리는 춘천마라톤 코스와 같으면 좋겠다 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배번호에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어서 뜨악하긴 했으나, 이름을 불러주는 응원을 받으며 마음이 풀렸다. 주로 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찌나 열심히 응원을 하시던지... 아마도 동원됐을 그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리 열정적으로 응원해주시는 걸까, 내 상황도 상황인지라, 그 때문에도 눈물이 날 뻔. 셔틀버스 운영이나 간식 수령 등 크고 작은 운영상의 미흡함이 있었다고 사과 문자를 받았는데, 이래저래 애쓴 흔적을 보았을 때 양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달리기 맛이 어떠냐 하면, 썼는데 달았다. 오늘 달리기가 인상적이었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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