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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Oct 23. 2024

글쓰기 위해 존재하는 영혼

카프카의 하루    


     카프카가 이직한 후, 그의 삶은 저녁 시간 글쓰기에 모든 일상이 맞춰진다. 

그는 이른 아침 출근해 온갖 행정 서류와 법정문을 작성하고 사람들과 만나 미팅하고 점심을 간단히 먹고 오후 2시에 퇴근한다. (완전 꿈의 직장 아닌가?!)  그렇게 낮잠을 한숨 자고 어둑해지면 일어나 저녁을 먹고 가벽게 산책을 한다. 그리고 늦은 밤까지 글을 쓴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카프카의 일상이다. 그는 필력을 일기를 키운 것 같다. 그는 펜을 들고 하루의 일과를 적어냈다. 일기부터 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써나갔다고 한다. 일기로 글쓰기 웜업을 한 셈이다. 일기를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루를 생각하면서 글감을 얻고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선별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마치 중절모를 쓴 카프카의 사진처럼 섬세하지만 공허하고 텅 빈 눈빛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거울 같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볼록 거울이고 오목거울이다. 완전히 똑같이 보여준다면 그건 문학이 될 수 없다. 모든 스토리는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를 전달할 때,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카타르시스까지 가기 위한 여정이 소위 말하는 빌드업이다. 캐릭터를 빌드업하고, 스토리를 빌드업해서 카타르시스를 만드는 사건의 모든 요소를 빌드업한다. 그리고 절정에 이르러 '팡' 터졌을 때, 작가가 의도한 온갖 감정의 불꽃놀이가 독자의 가슴에 펼쳐진다. 

    때로는 그 불꽃놀이가 화려하고 신나고 통쾌하지만은 않다. 특히 현대 소설은 더 그런 것 같다. 소설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 다양한 시도와 결말이 나온다. 열린 결말도 자주 등장하고, 빌드업도 개연성 없이 생기기도 한다. 현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아리스토 텔리스가 말한 '통쾌' 함은 즐거운 의미라기보다는 기승전을 걸쳐온 긴장감이 '팡' 터지는 그 순간을 말한다. 심장이 쫄 리든, 감성이 몽글몽글하든, 어떤 식으로도 키워진 감정이 예상대로 또는 예상 밖으로 터졌을 때의 느낌! 이런 마음의 움직임을 얻기 위해 문학을 읽기도 하고 소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글은 어떨까?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문학의 카타르시스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그는 자신의 모호한 감정을 글로 풀어내면서 근본적으로 마음을 해체하고 분류해서 걸러 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과정이 일기 쓰기였다. 그런 후에 그곳에서 재활용할 만한 것을 추슬러 글감으로 삼았다. 그의 일기와 작품에는 그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가 정말 자주 등장한다. 자신을 평생 인정하지 않은 아버지의 독선적인 모습에 글로 자신의 반항심을 갈기기도 하고 섭섭함을 꾹꾹 눌러 담아내기도 했다. 거기에 근원적인 죄책감이 많이 묻어 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자신이 될 수 없었던 죄책감. 지금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어울리지 않고, 그런 감정을 가질 필요도 없지만, 당시에는 큰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는 것은 매우 당연했고, 아버지의 분신 또는 아바타 정도로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이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모든 인간관계는 일방적일 수가 없다.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있을 때는 쌍방 과실이다. 단지 과실과 책임의 비중이 다를 뿐이다. 카프카는 이토록 아버지를 이해하기 이해하기 노력했지만, 그렇다면 헤르만은 무엇을 했을까? 그는 카프카의 이런 마음을 알아 채지도 못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목적지향적인 인간에게 이러한 섬세한 감정과 다정한 마음은 불필요할 뿐이었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은 독선적이고 폭력적인 관계방식을 일관했다. 카프카는 이런 모습에 자주 절망했다. 그리고 그 절망을 해소할 방법은 작품 속 가상의 인물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직접적으로 반항하지 않고, 글로 풀어냈다. 하지만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한 것은 카프카가 만들어낸 제2의 아버지 상에게도 반항을 하거나 복수를 하거나 억압을 분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살면서 자신을 괴롭힌 사람을 악역으로 삼지 않을까? 어차피 허구의 일이니 과장되고 더 극적으로 그 악심을 부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카프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고 그의 생을 추적하다가 이 질문이 떠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낸 건, 카프카는 누군가를 악역으로 만들 만큼 심성이 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건 그의 작품 변신에 아주 잘 드러난다. 이 부분은 글의 끝 편에 가서 변신에 대한 분석을 좀 더 할 때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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