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하자 변심했다.
여동생은 작품 초반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족 내에서 역할도 존재감도 매우 작다. 하지만 그레고어의 정서적인 애착 인물이었다. 그레고어는 여동생을 아끼고 그녀가 원하는 음악학교에 보내주기로 맘먹고 열심히 일한다. 그레고어가 벌레로 변한 후 여동생은 부모님이 접근하기 꺼려했던 그레고어 방에 들어와 방청소도 하고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생각도 하고 나름, 마치, 돌보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면서 가족 나 자신의 존재감을 오빠를 돌보는 역할로 규정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높여 간다.
이 작품에서 가장 극명하게 변심을 드러내는 인물이 여동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태도가 어떻든지 일관되게 무관심하고 무뚝뚝하게 그레고어를 대한다. 아버지는 무신경으로 어머니는 불안하게 호들갑스러운 모습으로 마이다. 하지만 하지만 여동생은 마치 오빠를 다 이해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독자는 여동생이 그나마 오빠를 잘 돌봐주는 것처럼 착각에 빠진다. 그녀의 감정 변화는 작품 초반에 드러나지 않고 그레고어가 벌레로 변한 후에도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사회생활을 하며 생계 전선에 뛰어들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돈을 버는 노고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보통이라면 이런 경험 끝에 철이 들고 돈을 벌어다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낄 텐데, 적반하장의 상황이 펼쳐진다. 그레고어를 원망하고 집안이 이렇게 된 모든 원인이 그레고어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레고어 덕분에 편하고 사치스럽게 살았던 감사대신, 당장 자신이 겪는 불편함과 고통에 괴로워하며 이런 감정을 해소할 대상을 그레고어로 삼는다. 변심의 비극적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극적인 변심은 여동생의 이러한 태세전환이 아닐까 싶다.
작품이 끝을 향하면서 여동생은 그레고어를 더는 '오빠'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괴물/ 짐승 Untier라 부른다. Untier의 독일어 사전 Duden을 참조해 보면 '징그럽고 성질이 나쁘며 거칠고 위험한 동물'이라고 정의한다. 입말로 사용되지 않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단어를 사용해 카프카는 더 극명하게 인간도 동물도 아닌 가장 진화가 덜 된 하등의 벌레로 보이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여동생은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한 부모를 설득한다. 오빠라는 벌레 또는 벌레라는 오빠를 가져다 버리려야 한다고 악을 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들의 행동에 비난을 던질 사람이 없다고 자기 합리화에 빠진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저것'이라고 나온다.
“저것을 가져다 버려야 해요”
작품을 읽어 나아 갈수록 과연 누가 벌레로 변신을 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겉모습은 벌레지만 인간 내면의 존재론적인 실존을 깨닫는 주인공과,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면은 돈을 좇는 영혼이 돈벌레로 드러나는 가족, 과연 누가 벌레일까?
주인공은 벌레가 되고 나서 그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는다. 이사를 가려할 때도 기꺼이 자신을 상자에 넣어 숨겨 가면 된다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가족은 그레고어의 존재만으로도, 그가 거실에 나타나거나 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은 위협을 느끼고 공포감에 떤다. 그레고어가 벌레로 변신하기 전에도 가족은 그레고어가 가족을 위한 헌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벌레로 변신하고 나서는 자신들의 불행이 그레고인 것으로 몰아 새우며, 오히려 피해자 마인드, 피해의식으로 그레고어가 가져온 불행의 희생양인 듯 행동한다. 가족은 지난날 그레고어의 역할에 대한 고마움 대신 자신들은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어를 위해 할 만큼 했다는 식의 합리화로 그레고어를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감금시킨다. 자신들의 불편함과 앞날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정작 무엇인 진정으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벌레로 변신한 주인공만이 인간이었을 때 미처 몰랐던 진실과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뿐이다.
100여 년 전의 작품이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행과 원인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준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인간의 존재는 무시당해도 된다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주인공의 수동적이고 담담한 자세로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