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VA Oct 25. 2024

타인이 지옥이라면 나도 누군가의 지옥이다.

존재와 역할

 

“저, 옆방에 있는 그것을 치울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세요. 제가 벌써 치워 놓았으니까요” 


    가족이 모두 일한다는 핑계로 벌레가 되어 버린 그레고어를 돌보기 꺼려해서 결국 그들은 늙은 하녀를 고용한다. 늙은 하녀는 벌레가 되어 버린 그레고어를 진짜 벌레 취급한다. 그리고 벌레의 사체, 그레고어의 죽은 몸덩어리를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마냥 치워 버리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듯이 그레고어의 어머니에게 보고한다. 그레고어가 사라지자 늙은 하녀의 역할도 사라졌다. 그의 가족은 늙은 하녀를 바로 해고한다. 가족은 마치 그레고어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흔적과 잔재를 눈앞에서 그리고 기억 속에서도 지워버리려 한다. 자신들의 불행이 마치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어 탓이라는 듯 서둘러 없애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들의 집에는 다시 생기가 돌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솟아난다. 불편함이 해소되고 집안에 벌레가 사라졌다는 해방감에 겨워 외출을 나간다. 부모는 더 좋은 새집으로 이사를 계획하고 어느덧 성숙해진 딸의 결혼을 꿈꾼다.  


    그레고어의 헌신은 그야말로 헌신짝이 되어 버려지고, 그레고어는 가족의 불평과 폭력적인 언행의 학대를 반박 없이 그대로 받아 드린다. 카프카 소설 속 주인공은 대부분 수동태의 모습이다. 그들은 타인에게 전염된 불안을 극복하지 않고,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고민한다. 통념적으로 그렇게 고민하고 답을 찾는 과정이 있다면 해결책이 나오는 게 소설의 묘미겠지만, 카프카 소설의 끝은 주인공들이 해결책을 찾지도 못하고, 왜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는지도 모른 채 끝이 난다. 안갯속에서 시작해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변신>의 그레고어는 카프카 자신의 아바타 같은 느낌이다. 독단적인 아버지 밑에서 기죽은 채 순종하는 모습이다. 가족에 대한 섭섭함과 원망도 없이, 자신이 바라던 삶은 포기하고, 가족이 원하는 대로 삶의 끈을 놓아 버린다. 그레고어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니면 자연사인지 심리학자와  법의학자와 생물학자들에게 질문해야 할까? 벌레는 딱딱한 껍질로 체액을 보존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그 껍질을 뚫고 그대로 등에 붙어 있다. 염증이 발생했을 것이고 체액순환이 안되었을 것이고,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어마어마한 공포와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타인은 지옥이다 (C'est l'enfer, les autres.) '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이 문장은 참으로 오해가 많은 문장이기는 한데, 사르트르가 말한 맥락을 보자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지옥이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타인이라는 모순적인 존재, 나를 대상화하고 판단하면서 동시에 내가 그들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이 모순적인 관계가 지옥이라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판단하고 평가하고 거기에 휘둘리는 삶이 지옥이라는 것이다. 지나친 인정 욕구에 휘둘려 사는 삶을 말한다. 그렇다고 타인을 무시하고 살면 어떻게 될까? 동물원에 가서 홀로 '나는 왕이다'를 외치는 격이다. 나라는 존재, 나의 정체성은 타인의 시선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레고르가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려 든 건 자신의 외모를 판단한 3명의 하숙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을 위해 여동생이 연주하던 바이올린 소리에 이끌려 나갔지만, 하숙인들은  오직 '벌레'만 봤을 뿐이다. 그레고어는 자신이 음악을 듣고 감동할 줄 아는 자아가 있는 영혼이라 했지만, 오히려 가족들과 하숙인들에게  자신을 모욕하라고 기회를 준 셈이다. 그들에게 받은 욕과 적대적인 시선으로 그는 수치심과 소외감을 느끼고 타인의 시선을 수용해 버리고 만다. 


     

  <변신>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그 비극이 오묘하게 숨겨져 있다. 결말은 마치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를 거니는 듯한 가족의 희망찬 모습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벌레가 사라진 것은 희망이었다. 그레고어는 더는 인간도 가족도 아니었다. 한때 그들을 먹여 살린 돈벌레였을 뿐이다. 어떻게 한 사람을 저렇게 대할  수 있냐고 분노하는 하고 슬퍼하는 독자가 대부분일 거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사실 자본주의의 순정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옭아매며 경제적으로 착취와 남용의 관계로 쉽게 변질된다. 선택할 수 있다면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도 있지만 가족은 애초에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태어나면서 불가항력적인 운명으로 정해지기에 남보다 더 못한 존재로 전락한다. 주변을 보면 안타깝게도 경제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집안의 근심거리로 차갑게 외면당하는 가족구성원들을 쉽게 발견된다. (물론 자발적인 등골브레이크도 많다) 존재의 가치가 역할이 전부인 것으로 환치되어 벌레 취급받는 역할에 매몰된 슬픈 벌레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가족 공동체가 원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바로 버림받는 일이 소셜 미디어의 쇼킹한 채널에만 나오지 않는다. 가족 간의 개인사에 관여하거나 개입하려고 드는 것은 아니지만, 돈으로 환산된 인간관계가 가족까지 스며들어다는 사실에 각성과 변신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 세상은 정말 상대적이다. 양극을 오가는 수직선에서 자신만의 비율과 배합으로 균형을 찾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가 배합해 놓은 비율을 따라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보고 수정과 조정의 과정이 필요하다. 맹목적인 타인의 욕구와 욕망을 따라가면 우리는 모두 벌레가 된다. 어린 시절에는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럽다. 사춘기 자녀들이 미친 듯이 속상하게 굴 때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푼다. 사춘기 자녀가 맘에 들지 않는 건, 존재에 걸맞은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기에 우리는 그 존재 만으로도 고귀하고 유니크 하지만, 또한 우리는 사회 속에서 모두가 어울려 타인과 관계를 맺기에 사회생활에 맞는 역할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다. 존재만을 내세우고 채우려 한다면,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등골브레이크가 되는 거고 역할 만을 하려 한다면 ATM 기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불균형한 관계는 가족 간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전 14화 마지막 숨을 내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