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VA Oct 25. 2024

 마지막 숨을 내쉬다

죽음 앞에서 존엄을 잃고 싶지 않다


    그레고어는 외판원이라는 고된 직업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의 음악공부를 위해 뒷바라지도 생각하며 일했다. 하지만 나머지 가족들의 모습은 그레고어와 완전히 반대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어머니는 천식으로 고생하며 집안 살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여동생은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가끔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레고어가 벌레로 변신한 후에는 아버지는 은행에 취직하여 집에서도 제복을 입은 채 그 직업에 몰두해 생활을 할 정도다.  어머니는 집안일을 시작하고 남의 집 빨래일까지 하고 여동생은 상점에 나가 일한다. 모두가 각자 직장을 구하며 그레고어의 역할을 대신하여 돈벌이를 한다.

     이들은 왜 그레고어가 일할 때 일을 하지 않았까? 그레고어는 자신에게 의존하면서 편익만 추구하는 가족들의 이기심이 야속했지만 자신이 일 할 때 가족에게 나가서 돈 벌어 오라 소리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가불까지 받아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모아둔 비상금이 있다는 소식을 알고는 분노하는 듯했지만, 그 분노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행동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그는 벌레니까. 가족이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고 공기취급하자, 이제는 그레고어 스스로 자신은 사라져야 할 존재라고 여기고 삶의 의지를 접어 버린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 느끼는 아침이 있다. 하지만 온몸의 신경이 눌리고 근육이 뭉쳐 내 의지대로 몸이 가볍지 않을 뿐이지 몸이 벌레로 변한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이 그렇게 느끼고 머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다. 벌레로 변해 버린 그레고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부모님이 하숙을 친 하숙인들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할 때 하숙인들은 무시했지만, 그레고어는 감동했다. 음악의 선율을 느끼고 감동하는 자신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레고어는 자신의 변신에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지만 결국 그레고어는 자신이 벌레라고 사라져야 한다고 그것만이 해결이 될 거라는 수동적인 자세로 모든 상황을 수용한다. 그레고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 한 알이 등에 박혀  살이 썩고 마침내 온몸이 경직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그레고어 어는 몸이 썩어가는 고통도 언젠가는 끝이라는 슬픈 안도감과 자신을 오랫동안 짓눌린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는 평화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사라지는 자신의 존재를 느끼며 고독하게 마지막 숨을 내쉰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또 다른 시작이 있다. 인간이 무한한 능력과 한계를 뛰어넘는다 해도 죽음만큼은 극복할 수 없다. 많은 종교와 영성의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죽음 뒤에도 또 다른 삶이 있다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논의는 잠시 접어두겠다.  살면서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하고 이별이 있으면 또 다른 만남이 있다는 슬픈 희망이 공존하지만 죽음, 즉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절망이다.

    이별, 관계는 끝이 나도 어딘가에 있다는 존재감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이 들며 미련과 슬픔을 달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이런 일말의 희망조차도 사그라들게 만든다.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존재, 똑같은 사람은 더는 이 세상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조차 희미해지겠지만. 그때까지는 고통과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한다. 죽음은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있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상실감을 남긴다.

    죽음도 삶의 과정이기에 존중받아야 한다. 아기의 탄생처럼 웃음과 희망으로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함과 추억으로 편안하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그런 존중말이다. 죽음을 예견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곳에서는 남은 시간을 두려움이 아닌 자신의 삶을 차분히 정리하고  존엄성을 유지하며  이 세상에 남게 되는 가족들을 정신적으로 위안하고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인식한 시한부 환자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줄이고 정신적으로 평안한 마무리를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레고어도 이런 마무리를 원했을지 모른다. 등에 사과가 꽂히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그레고어는 최소한 마지막만큼은 가족과 화해하고 평화롭게 마무리하기 원했다. 하지만 끝끝내 소통은 일어나지 않았다. 등에 박힌 사과 때문에 그레고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여동생은 알고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그 방을 들락날락 할 수 있었고 유일한 가족 간의 연결 고리였다. 하지만 여동생은 그 고통과 존엄하고 생을 마감할 기회조차 박탈해 버리고 만다. 그레고어를 죽게 한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절망과 고독 아니었을까



이전 13화 변심이 곧 변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