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어머니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by 마잇 윤쌤

엄마는 암 진단을 받은 뒤, 몇 주 만에 정밀검사를 위해 서울 A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제 엄마와는 더 이상 돌봄을 함께 할 수 없었어요.


부랴부랴 학교 돌봄교실에 전화를 걸었지만, 정원은 이미 가득 찼고, 저는 대기번호만 부여받았어요.


막다른 골목을 마주한 것처럼 막막했던 그때 남편이 시어머니께 부탁드려보자고 이야기를 꺼냈어요.


시어머니는 집에서 30여 분 남짓한 거리에 살고 계셨고,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부탁드려볼 수 있다고 하면서요.


그렇게 저는 갑작스럽게 시어머니와의 육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되도록이면 시어머니와 육아를 함께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것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니와 저는 서로의 성향이 정반대에 있다고 오래전부터 느껴왔거든요.


저는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인데 반해, 시어머니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움직이는 분이셨어요.


시어머니의 그 유연함 속에서 저는 자주 놓치는 부분들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각자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아이에게 그런 빈틈이 가득한 일상을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젊은 시절 오랜 시간 미용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자녀들을 직접 키운 경험이 없으셨어요. 말하자면 육아라는 세계에서는 저보다도 낯선 초보자셨던 셈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딸아이를 가족이 아닌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남보다는 가족이 낫지 않을까."



그건 희망이라기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간신히 붙잡은 실마리 같은 믿음이었어요.


시어머니도 그다지 반겨 하지 않으셨고,

무엇보다 딸아이가 정말 좋아하지 않았어요.



"할머니가 병원 갔다가 오면 안 되는 거야?"



해맑게 몇 번이나 물어보는 아이에게,

저는 담담히 그럴 수는 없다고 했어요.


그 시기, 엄마는 폐암 4기 진단을 받았거든요.

엄마의 몸 전신에는 암이 전이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딸아이를 설득했고,

가장 못 미더워하는 제 자신을 스스로 설득하며,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프리랜서로 전향한 지 2년,

코로나19도 어떻게든 버텨왔는데,

이제 정말 일을 그만둬야 하나 싶었어요.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내 애도 제대로 못 돌보면서...

남의 애들을 치료하겠다고 나서나...

하는 생각들이 수시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휴대폰도 없던 여덟 살 딸아이를

낯선 사람에게, 낯선 공간에게 맡기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결국,

불안과 의심을 마음 한편에 가득 채운 채로

저는 시어머니와의 육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부모도 처음이라 서툴지만,

우리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마음을 잇다 : 마잇 윤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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