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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Aug 27. 2019

친구여,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소중히 여기시게나

현대인에게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

김영하 작가의 산문 <여행의 이유>의 여섯 번째 주제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다. 그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125p)라고 운을 뗀다.


그 글을 읽고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여기, 제가 바로 그 소설을 읽지 않은 몇 안 되는 희귀 인물입니다!


책을 덮은 후 곧바로 도서관을 찾았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빌리기 위해서 말이다. 모두가 읽어 마땅한 소설을 읽지 않았다는 부끄러움보다 김영하 작가가 들려주는 소설 자체가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조지 크룩생크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 동판화 (1823)



나같이 아직 소설을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해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주인공 슐레밀은 한 파티장에서 회색 옷을 입은 남자(나중에 악마로 판명)에게 그림자를 팔라는 이상한 제안을 받는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같은 그림자와 금은보화가 무한정 쏟아지는 마법의 자루를 교환할 수 있다니, 슐레밀은 망설이지 않고 그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엄청난 부를 얻은 기쁨도 잠시, 슐레밀은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의 온갖 비난과 멸시를 받게 된다. 후회를 한 그는 그림자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다시 만난 악마는 그림자를 돌려주는 대신, 죽은 후 자신에게 영혼을 팔라는 또 다른 제안을 한다.


고민 끝에 슐레밀은 악마의 제안을 거절하고 마법의 자루도 내팽개친 채 외롭고 고독한 떠돌이 인생을 선택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터에서 우연히 날아다닐 수 있는 요술 장화를 갖게 된 슐레밀은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방랑자로서 탐험가로서 만족스럽게 살아간다. 비록 자신의 그림자는 포기했지만, 그림자가 인간에게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슐레밀은 소설 말미에 저자 샤미소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벗이여,
만약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라면 부디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 주게나.
물론 자네가 단지 자기 자신, 그리고 더 나은 자기 자신과 함께 살고 싶다면,
자네에게는 그 어떤 충고도 필요 없겠지만.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그림자를 판 사나이, 138p


그림자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소설의 해석이 소설의 1/3 분량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소설 자체보다 소설에 담긴 의미, 즉,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지녀야 할 그림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소설은 1813년에 출간했는데, 출간하자마자 그림자의 의미가 동시대 독자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167p) 수많은 저명한 연구자들도 이 소설의 해석에 참여함으로써 단순한 내용의 소설에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는 양상(140 p)을 보였다고 한다.


이 소설은 '돈'이 지배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사회 현실의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도 있고(150p),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망명길에 오르며 독일에 정착해 '경계인', '영원히 떠도는 망명자'의 삶(170p)을 산 샤미소 작가와 주인공 슐레밀을 동일시하는 전기 주의적 관점으로도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림자를 고향, 조국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보편적인 것'으로 확대할 수 없기에 이 관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럼, 도대체 그림자는 무엇일까?


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김현경은 이 '그림자'를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김영하는 자신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이것은 '성원권(membership)' 즉,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타인이 우리를 사람으로 받아들여주어야 한다. 조선시대 백정은 분명히 인간이었지만 양반과 상민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구한말 진주에선 자식들이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오자 양반과 상민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며 퇴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일들은 전 세계에서 벌어진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완벽하게 양반이나 상민과 같지만, 그들은 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장소도 주어지지 않는다. 20세기 초반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백인들의 공간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타인의 환대가 필요하고, 적절한 장소도 주어져야 한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127p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 해제에서 같은 맥락으로 그림자는 결국 '사회적 맥락'에서 조명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으로 그림자 없이도 슐레밀은 존재지만, 다른 한편 그림자 없는 슐레밀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이'로 여겨진다. 후자의 경우 그 존재 여부는 물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파악되는 바, 즉 그림자 없는 슐레밀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며 그로 인해 슐레밀은 고통스러워한다.
결국 그림자와 그것의 상실과 관련된 의미는 사회적 맥락에서 조명될 수밖에 없으며, 그 맥락은 다양하게 파악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된 결과로는 대체로,
1) 그림자와 마술 주머니 간의 거래에서 그림자는 돈만을 숭배하는 자본주의적 의식과 타락을 지시하는 기호이며,
2) 그림자 상실은 잃어버린 고향(조국)에 대한 기호이며,
3) 그림자 상실은 곧 집단적 기억의 상실에 대한 기호이며,
4) 그림자 상실은 정상적인 시민적 연대성의 상실에 대한 기호이며,
5) 그림자 상실은 호모 에로틱한 남성을 비정상적인 자로 낙인찍은 사회적 기호이기도 하다.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그림자를 판 사나이, 168p


나는 소설을 읽으며 그림자라는 것이 어쩌면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양심, 동정심, 도덕성'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그림자에 대입했을 때 매끄럽게 읽히기도 했고, 또 어디서는 애매하게 안 맞는 것 같기도 해서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해제를 여러 번 정독함으로써, '그림자'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고 다양한 것들을 상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비로소 홀가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소설 출간 시점인 19세기에도 이 그림자를 놓고 다양한 논쟁과 토론이 벌어졌다고 하니, 나만 혼란스러운 것은 아닌가 보다, 싶어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는 바로 '무엇'이다,라고 딱 떨어지게 정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작가인 샤미소 조차도 자신을 낮추고 독자의 다양한 가설과 해석을 중시하는 모습을 내보였다(167p)고 하니 그런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소설 속 슐레밀이 '막대한 부'와 맞바꾼 그 '그림자'에 대해 내가 그렇게 골몰했던 건, 나 또한 내 그림자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그림자의 존재를 인식한 적도 별로 없는 듯하다.)


만약 회색 옷을 입은 남자(악마)가 나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면, 나 역시 별생각 없이 (속으로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내 그림자를 쉽게 내주었을 것 같다.


소설 해제의 한 부분을 인용하자면,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으로 돈에 지배된 상태"이며, "계급 사회 내에서 탈인간화를 낳게 되는 돈의 영향"을 무시하기는 힘들었을 것(160p)이기 때문이다.


막대한 부와 맞바꾼 그림자. 여기서 방점은 '막대한 부'와 바꿀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는 것.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부' 말이다. 현재에도 우리는 '돈'과 교환하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자존심, 영혼까지도 내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슐레밀'이 아닐까 하고 곱씹어 보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인간학적 가치를 지닌 그림자와 경제적 가치를 지닌 마술 주머니 간의 상호 교환은 애초에 교환이 성립할 수 없는 '잘못된 교환'이었다는 것을.(159p) 그렇기에 막대한 부를 손에 쥐고도 슐레밀은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으며, 영혼까지 팔고 싶지 않았던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떠돌이로 살아가는 것뿐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악마의 온갖 유혹에도 자신의 영혼만은 끝까지 지켜낸다. 자신이 저지른 어리석은 짓을 후회할지언정,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대신, 자신의 힘으로 날아다니는 요술 장화를 얻어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방랑자로서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간다.


2세기나 지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전하는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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