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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넥스트 커리어 코치 Oct 20. 2022

나만의 희열을 따르고 있는가

2011년 4월


조지프 켐벨의 <신화와 인생>을 보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살 수 있고 스스로 기쁨을 느끼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산 적이 있던가?


첫 번째 내 꿈은 수학 선생님이었다. 중학교까지 가장 좋아한 과목은 '수학'이었다. 중학교 1학년 수학 과목인 담임 선생님을 보며 '나도 저런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하지만 고등학교 수학이 장애물이 되면서 '수학선생님'이란 꿈을 접었다. 고3 때 비로소


‘이제 나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무엇을 해야 기쁠까?’


라는 고민을 처음 시작했다. 주말에 갑자기 이메일을 확인했다. 수백 통의 스팸 메일을 정리하다 스튜어디스 양성학원의 광고메일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파일럿'이란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그래!! 나는 하늘을 날고 싶어. 파일럿이 되어야겠다!!'


고등학교 3학년의 절반이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그때부터 파일럿이 되는 방법을 찾았다. 공군 사관학교에 진학하는 방법이 있지만, 성적이 되지 않아 포기했다. 두 번째는 '항공 대학교의 항공 운항과'에 지원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입학 원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항공대학교 항공운항과에 입학해도 비행기 조종을 하려면 유학을 가야 하고, 파일럿이 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들었다. 유학을 갈 여력이 안 되어 선택하지 않았다. 사실은 '파일럿'이라는 꿈이 절실하지 않았거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선의 선택으로 '수학통계학부'를 선택했다. 졸업 후 돈을 벌어서 항공 유학을 갈 수 있다. 하지만 안 되면 '수학선생님이라도 해야지'라는 생각에서 결정한 것이다. 내가 현실과 타협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이때의 선택을 후회한다. 내 꿈이 파일럿이라고 얘기하면 10명 중 여덟은 내게 물어본다. “그런데, 왜 항공대나 공사 지원 안 했어?”라고. 나는 할 말이 없다. “안 될 수도 있어서..”라는 답은 정말 궁색한 변명일 수밖에 없다. 내가 정말 간절히 원했던 것일까?


대학 1학년의 마지막 기말고사를 보고 미국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러 갔다. 난생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쉬는 날에는 내가 번 돈으로 여행을 다녔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마지막 여행지로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를 선택했다. 공항에 한인 택시 기사님이 데리러 와 주셨다. 가는 길에 기사님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민 온 한국인들은 투잡을 해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시작이었다.


택시기사가 부업이란 말에 원래 하시던 일이 무엇인지 여쭤봤다. 항공학교에서 비행을 가르친다고 했다. '파일럿'이 직업인 것이다. 순간 머릿속에서 굉장히 밝은 빛이 번쩍였고, 잊었던 나의 꿈이 되살아났다.


'파일럿!!!! 이분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지도 몰라!!’


공사나 항공대를 졸업하지 않고 파일럿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유창한 영어는 필수고, 시력이 좋아야 하며, 돈이 꽤 많이 든다. 대한항공보다 아시아나 항공에 유학파 파일럿을 많이 뽑는다는 정보를 주셨다.


시력은 좋았고, 영어는 공부하면 되고, 돈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어떻게 돈을 모아 유학을 갈지 고민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아르바이트로 비행기 값만 모아서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를 타겠다고 아저씨에게 말씀드렸더니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최소 5,000만 원은 가지고 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고,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예요. 결국엔 시간만 버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죠."


그때부터 나의 목표가 정해졌다.


"5,000만 원을 모아야겠다!!"

학교에서 오래 머무는 건 낭비였다. 남들처럼 휴학할 여유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졸업과 빠른 취업'을 목표로 대학 생활을 했다. 그리고 입학한 지 4년 만인 2006년 2월에 졸업을 했다.


취업을 위해 입사 원서를 50군데 정도 냈다. 그중 면접까지 갈 수 있었던 곳은 딱 한 곳.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기업이었다. 하지만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러다 내가 입사한 곳은 재무상담(보험) 회사였다. 입사 후, 한 달간 교육을 받으며, '굉장히 매력적인 직ㄱ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의 지인들이 더 잘 살 수 있고, 돈을 관리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이라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여자들이 더 잘 살 수 있게 도와주자'는 목표가 생겼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파일럿'이란 꿈은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서 소개를 할 때는 늘 꿈을 얘기했다. 언젠가 파일럿이 되면 꼭 비행기를 태워드리겠다고. 사람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꼭 당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기를 바란다’고 응원해 주었다.


입사 5개월 만에 모회사인 외국계 기업으로 합병이 되었다. 지인과 소개해준 사람들의 일부는 고객이 되었다. 4년간 나름 열심히 했다. 하지만 2010년은 매우 고통스러운 해였다. 영업이라 매일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만나기가 싫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나쁜 실적으로 이어졌다. 경제적인 문제까지 겹치면서 심적 부담이 커졌다. 암흑의 시간을 보냈다.


2010년 9월, 나는 첫 직장에서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인원 감축과 임원진 대거 퇴출이 진행됐다. 그때 나는 최저 영업 실적을 맞추지 못했고 결국 회사에서 잘렸다. 그러던 중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었다. 한창 소셜커머스가 시작하던 때였다. 그즈음 관련 사업을 시작한 그분의 사업을 도와 일을 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첫 직장에서 ‘스스로’ 나왔다면 고객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괴감으로 힘들었을 거다. ‘중도 포기’한 낙오자로 어떤 일을 해도 자신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린 덕분에 ‘회사’는 평생 내가 몸담을 곳이라기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임을 알았다. 그리고 언제든 박차고 나올 수 있는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만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지금 여기’라면 계속 머물러도 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희열을 느끼지 못하는 공간’이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지금까지 ‘나만의 희열’을 찾아 지금에 이른 것처럼, 앞으로도 ‘나만의 희열’을 찾아 살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 어떤 일들이 펼쳐지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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