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언제부턴가 아주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는 내가 너무 싫었다. 스물일곱부터는 현실에 대한 괴로운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물아홉에 총체적 어려움이 찾아왔다. 방황의 씨앗은 어떤 잡초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싹텄다. 이렇게 나의 서른은 내가 꿈꾸었던 온실 속 화초가 아닌 돌무지 사이의 이름 모를 잡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스무 살에는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거라'라고 믿었다. 서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서른에 가까워지면서 앞으로 내 생에 이보다 힘든 때는 없을 거라 여겨질 정도로 아프고 괴로워 방구석에서 무릎을 감싸 안고 펑펑 운 적이 있다. 젊은 베르터가 알베르트에게 얘기한 '소녀의 심연'이 여러 번 찾아왔다.
심연에 들어서면 어떤 전망이나 위안이 없는 사방이 캄캄한 어둠에 둘러싸여 모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혼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심연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욕망을 느낄 수 있다. 베르터의 말처럼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 빠져나올 수 없을 때 인간에게 가능한 선택은 죽음뿐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 소녀도, 베르터도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이 심연은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앞으로 찾아 올 심연의 순간들에 베르터의 방식보다 나만의 방식으로 현명하고 덜 아프게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서른 즈음에>, 김광석
이 노래의 가사를 온전히 음미할 수 있는 나이 서른이 되었다. 이십 대에는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다. 왠지 서른이 되면 삶의 방향이 정해지고, '안정적’으로 살 것 같았다. 번듯한 직장 생활을 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명함도 바꾸며 서른에 만들 수 있는 커리어를 차근차근 쌓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첫 직장에서는 10년이 지나도 같은 일을 하고 계획대로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계획이 어긋날 때마다 좌절했다. 이제 계획에 대해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프랑스 소설가 앤드류 모르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번도 생활의 마스터플랜 같은 것을 세워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단기간의 계획은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도 우연이 작용되어 계획이 말살되고, 때로는 묻혀 버리게 되고, 때로는 개선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뜻밖에 일어난 일이 나에게 주제를 제공하여 준 일도 있었습니다."
내게도 '무계획이 계획'이란 신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연에만 기대어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몽테를랑처럼 두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고 싶다.
"늘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었던 일을 할 것, 늘 마음에 당기지 않는 것은 내일로 미룰 것"
서른인 지금이 좋다. 이상하게 돈이 안 되는 것에만 손이 간다. 그리고 결국 시급 5천 원짜리 생계형 알바를 시작했다. 안정된 직장과 월급도 없지만, 자유가 있어서 현재의 모습이 만족스럽다. 자유를 위해 돈을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선택하면서 '돈'이 따라오는 인생을 만들고 싶다. 10년 뒤 마흔이 되었을 때의 내 모습은 계획하지 않기로 했다. 단지 한 가지 상상한다면 인생 자체가 베스트셀러인 작가가 되었으면 한다.
보잘것없는 인생을 쌓는데도 인생은 너무나 짧기만 하니까, 모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