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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넥스트 커리어 코치 Oct 21. 2022

엄마가 버리기 시작했다

2011년, 못 버리는 우리 엄마


"아니, 이건 학생이사가 아니잖아요?  4인 가족 이삿짐인데??"


7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가족은 서울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 있게 되었다. '학생이사'라고 기사님을 불렀는데 트럭에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보고 아저씨가 하신 말이다.

20년간 다섯 식구가 살던 집의 짐이 서울 고시원 건물 지하주차장에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식당 할 때 썼던 주방기구부터 치킨 배달할 때 쓰던 오토바이까지 ‘존재조차 잊힌 물건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짐은 이사한 아파트로 옮겨졌다.


엄마는 늘 '언젠가 쓸 일이 있다.' 혹은 '버리고 나면 꼭 쓸 일이 생긴다'는 신념 때문에 버리지 못한다.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보다 몇 년째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차지한 공간이 훨씬 많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란 책에서는 집안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이 사람의 기를 가로막는다고 한다. 집안 곳곳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물건들을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오면서, '이 집에서 얼른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리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2021년, 명상요가 4년 차

나의 권유로 엄마도 명상요가를 한 지 4년이 됐다. 명상요가를 시작하고 엄마에게 신체적으로 좋아진 점이 있는지 물었다.


“뻣뻣한 게 많이 풀어졌어. 원래 발끝을 안쪽으로 향해 걷는 습관이 있어서 내 다리가 O 자거든. 요가할 때 선생님이 일자로 걷는 법을 알려줘서 O자 다리도 많이 펴졌지. 어깨도 많이 부드러워지고. 몸이 전체적으로 많이 유연해졌어. 사람들은 몸이 비뚤어져 있어도 그런지 모르는 경우가 많잖아. 요가를 해 보면 내가 얼마나 비뚤어져 있었는지 알 수 있어.”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달라진 게 있는지 물었다.

“긍정적으로 바뀌었어. 주변 사람들에 대한 험담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잘 안 해. 스스로나 주변 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고. 특히 우리 딸이랑 사이가 좋아졌지. 딸이 착해진 건지 내가 착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서로가 하는 일에 반대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존중하게 된 것 같아. 또 예전에는 상대가 나를 공격한다고 느끼면 나도 같이 공격했어. 근데 지금은 상대가 나를 총으로 쏘듯이 공격을 해도 솜으로 총알을 감싸듯 넘겨 버려.”


2021년, 엄마가 버리기 시작했다

동생은 휴가 오기 전부터 엄마에게 집을 치워 놓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엄마는 나름 매일 1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하나씩을 꽉꽉 채워 내놓았다.


엄마 집에 일이 있어 갔더니 중고 거래에 눈을 뜬 엄마는 한쪽이 고장 난 김치냉장고를 가져왔다. 가로로 두어야 하는데 자리가 없어 세로로 놓는 바람에 좁은 통로가 막혀 있었다.


동생이 쓰게 될 작은 방에는 자개 농과 냉장고, 엄마가 그림 그릴 때 쓰겠다는 책상 그리고 각종 쓰레기로 꽉 차 있었다. 어린아이조차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엄마에게 물건을 버려야 공간이 생긴다고 얘기했다. 엄마는 작은 방의 냉장고, 캠핑용 테이블, 원형 테이블 등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 새 주인을 찾는 것에 동의했다.


작은 방을 차지하고 있던 냉장고가 팔렸다. 냉장고가 빠지자 공간이 생겼다. 주방에 있던 화장대는 엄마 방으로 옮겨졌다. 침대 머리맡에 있던 책상이 사라지자, 다른 책상을 한쪽 벽으로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침대 아래의 공간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티브이 놓는 선반으로 쓰던 책상은 작은 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안방에 있던 냉장고를 주방으로 옮겼으며 전자레인지 선반 겸 식탁은 화장대가 있던 자리에 쏙 들어갔다. 렌지대와 부대끼며 통로를 막던 김치냉장고는 냉장고 옆에 가로로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작은 방에 누울 공간이 만들어졌다. 엄마 방에도 요가매트를 펼 수 있게 됐다.


동생이 도착하고 6일 정도 지나 전화가 왔다.


"나 더러워서 도저히 못 참겠어. 이번 주 일요일에 엄마 중요한 일정 끝나는 대로 나랑 같이 다 버리기로 약속했거든. 다음 주에 와서 도와줘야겠어. 언제 시간 돼?"


월요일에 밀폐가 잘 되는 500ml와 750ml 주방용기를 사 갔다. 주방 대청소가 시작됐다. 엄마가 만든 빨랫비누, 된장, 고추장, 각종 양념과 젓갈이 무지 쌓여 있었다. 집안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만드는 속도보다 먹는 속도가 훨씬 느려 계속 계속 쌓이고만 있다.


그동안 이것만은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큰 결심을 한 것이다. '500ml'만 남기고 버리기로. 그중에 맛있는 것이라면 특별히 750ml를 남기기로 합의를 본 상황이었다.


오후 2시. 싱크대 물건부터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 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 너무 낡은 주방 기구 등은 모조리 버렸다.


5시간 동안 버렸다. 냉장고를 꽉 채우던 음식 중 1/3은 유통기한이 지났고, 1/3은 안 먹는 음식이었다. 수십 개의 1.5L 페트병에 담긴 것들 역시 거의 버렸다.

버리다 보니 엄마는 신이 나서 남기겠다던 것까지 다 버리기 시작했다. 꼬리꼬리 한 냄새의 주범이던 화장실에 있던 큰 김치통의 장을 마지막으로 음식 버리기가 끝났다. 그렇게 버린 음식물 쓰레기만 31kg이었다. 엄마는 신나게 버리면서 한 마디 했다.


"나 이제 아무것도 안 만들 거야. 절대 안 만들어. 이제 그냥 사 먹어야지."


듣던  반가운 소리였다. 엄청난 양의 음식과 용기를  트럭 가까이 버렸더니 주방에  공간이 생겼다. 엄마는 설거 하고 씻은 그릇을 싱크대에 바로 올려놓고 정리할  있게 되어서 무척이나 기뻐했다.


엄마 살아생전에 버리는 즐거움을 알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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