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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름 Sep 06. 2019

Fit이 안 맞는 거 같아요

영문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후기

여행을 마치고 4차 산업 혁명을 준비하는 마케터가 되고자 블록체인 회사에 들어갔었다.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발행하는 코인이 있었지만 내가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인 시장을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2019년이 되면 괜찮아질 거야 하고 전망했지만 대형 코인들이 제자리를 향해 갈 뿐, 작은 회사에서 만든 별 것 없는 코인은 땅을 파고 들어갔다. 딱 1년이었다. 1년만 버티자, 1년만 버티자 주문을 외다가 1년쯤 되던 때 그만두겠다 말했다. 의외로 회사는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이는 먹어가고 나도 내 살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는 여느 때보다 신중하게 다음 회사를 골랐다.


여행 후부터 계속된 지출로 카드값을 메꿔야 했다. 때문에 언제나처럼 공백기를 가질 수 없었고 연이어 바로 출근할 회사를 찾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다음 회사에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는 일은 마치 양다리를 걸친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전화를 받으러 나가야 했고 일이 끝나면 면접을 보러 갔다. 그렇게 이직 막바지에 이르러 피로도가 최고조 됐을 때 이 회사에서 입사 제안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어떤 회사인지 감도 잡기 어려웠다. 장황한 제안 메일에는 그래서 나를 뭘로 채용하고 싶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면접에 응해보기로 했다.


4년 차 스타트업, 대한민국에서 청소 대행을 연결해주는 O2O 서비스, 근데 미국 회사(?), 외국인 대표(?), 근데 내가 일하게 될 영역은 신사업 분야(??), 여태까지 해본 마케팅이라곤 퍼포먼스가 전부인 그런 회사.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사에 면접을 보고 나서도 약간 아리송했었다. 그래서 왜 나한테 연락을 했고 바라는 바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면접에서 그들과 나는 굉장히 다른 스펙을 가졌고 그렇기에 본인들이 할 수 없는 걸 내가 해줬으면, 그리고 내가 부족하지만 그들이 잘하는 것을 배워가며 함께 커가자는 말이 스타트업답고 좋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을 거쳐야 할 게 뻔히 보이지만 그런대로 새로운 밭을 일궈가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신사업 쪽 시장 전망이 괜찮다고 판단했고, 그 업계에서 이 회사와 함께 하나의 괜찮은 프로젝트를 내 이름을 걸고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올려줘도 모자를 연봉을 10%씩 깎아도, 보이지도 않는 스톡옵션을 거한 혜택인양 걸어대도, 공휴일에 쉬고 싶으면 연차를 써야 한다고 말했을 때에도 나와 회사가 함께 투자하며 길을 걷는다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심지어 열심히 일했다. 정말 오랜만에 이게 내 사업인가 싶을 정도로 일했다.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해도 나는 일관되게 일했다. 제휴 채널은 늘어나는데 디자인할 사람을 채워주지 않아서 밤늦도록 망고 보드와 싸웠다. 포토샵이 돌아가다가 몇 번씩 꺼지는 컴퓨터를 붙들고 디자인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마케터가 이벤트 페이지를 줄줄이 만들어댔다. 아 물론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업로드하는 일도 놓치지 않았다. 본사업에서도 바빠 신경 쓰지 못하는 채널들도 손써가며 조금씩 몸집을 불려 갔다. 이전에 관리되지 않던 PR에도 손을 쓰려던 참이었고, 대형 이커머스와도 손을 잡아가던 찰나였다. 입사하고 두 달 동안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 땅을 갈고 물을 주고 씨앗을 하나씩 심어갔다. 


우리 팀은 4명이었다. General Manager라는 직책의 총 사업 관리자, 서비스 운영 매니저, 서비스 운영 인턴, 그리고 나. 매주 General Manager와 주간 업무를 보고하고 플래닝 하는 미팅 자리가 있었고 그 미팅에서는 주로 지난주에 했던 일, 이번 주에 할 일, 업무 이슈, 피드백 등등을 진행하는 자리였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업무를 보고하기 위해 미팅에 들어갔다. 이런저런 일들로 보고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별안간 "수진님, 두 달 정도 일하셨는데 어떠셨어요?"하고 묻는 것이다. '보고할 게 산더민데 뜬금없이 회상..? 심지어 두 달 하고도 이미 열흘쯤 지난 시점인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리듬이 빠른 조직에 걸맞게 참 많은 일들을 접하고 실행하고 접었던 것 같다."라고 으레 상투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기운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감지했다. 그 사람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두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1) 본인은 이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진님은 실제로 이렇게 행동했다. 2) 지금 회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해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 이것저것 모든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 3) 아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가이드를 드리지 못했고 기획단계에서 협의하지 못했던 것 같다. 4) 수진님 시작하는 단계의 사업보다는 어느 정도 틀이 정해진 조직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5) fit이 안 맞는 거 같다. 6) 시간을 좀 더 가지고 두고 볼 수도 있지만 그냥 빨리 각자의 길을 가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한다. 7) 혹시 수진님은 여기에 더 남고 싶은 이유 있으신가요?


주간 미팅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말로 얻어맞았다. 아니 나 해고당한 거야? 그동안 한 마디의 언질도 없다가 이렇게 갑자기 우리 잘 안 맞는 거 같아요. 여기서 나가주세요.라고 한다고? 채용은 3차 면접까지 꾸역꾸역 참석하게 해 놓고 자르는 사유는 안 맞는 거 같아요..? 뭐 헤어짐의 이유가 성격차이 같은 건가. 미안하지만 난 저 위의 모든 말에 할 말이 있었다. 당시에 너무 생각지 못한 일이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이 빨개져서 어버버 하다가 그 미팅(아니 해고 통보하는 자리)이 끝나버렸지만


1) 저건 서비스 첫 이용 무료 이벤트에 관한 이야기다. 신규 고객을 유치하고자 이벤트를 기획하고 실행했는데 결론적으로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보지 않았던 거니까 해봤다는 것과 이 서비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의 정보를 받을 수 있었던 것 자체로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가 말하는 내 행동은 이벤트 이후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을 마스코트 안 했다는 것이다. 고객 유입-서비스 이용-후기까지 내가 컨트롤하길 바랐단다. 2) 그래서 내가 콘텐츠 마케터로 채용돼서 제휴, 홍보, 디자인, 가끔 운영 서포트, 실제 서비스 제공까지 하는데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거지. 위에서 말한 고객관리/CS를 안 했다고 그러는 거니? 아마 내가 생각하는 모든 일의 기준은 마케팅에서의 모든 일이었고 그가 생각하는 모든 일의 기준은 사업부의 모든 일이었던 거 같다. 3) 그래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쪽이 리더신데 가이드를 주셨어야죠? 본인의 리더로서의 책임을 왜 나에게 전가하시는지? 그럼 그전에 저에게 한 번의 리더십이라도 보여주셨었나요? 4) 이건 2번의 사유와 이어지는 얘기인 듯한데, 지금 이 사업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본인은 더 작게 생각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그는 현재를 바라보고 일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미래를 바라보고 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 기성복을 10%나 깎아서 사놓고 맞춤 제작한 옷이길 바란 건가? 6) 이미 판단은 끝났고 통보하셨는데 7) 제가 여기서 무슨 말을 더..?


주변 지인들에게 '나 짤렸다?' 하고 말하니 다들 '뭐???', '너같이 갈아 넣어서 일한 애를?', '진짜 어이없다 왜 자른 거래?'하고 말한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에게도 소식을 알려야겠어서 말했더니 '에? 수진님이 관둔다고 한 거 아니에요? 전 그 사람이 수진님 이번 주까지 근무한다길래 스스로 관두시는 줄..' '갑자기? 너무 황당하다. 이 회사 왜 이러냐 진짜..' 하며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들어보니 이 회사는 여태 이렇게 한결같이 사람을 잘라왔고 그 이유는 대부분 'Fit이 안 맞아서' 였단다. 요즘 세상에 하루아침에 사람을 자를 수 있는 회사라니. 그게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그 말을 안 믿었을게다. 내가 회사에 중대한 피해를 끼치거나 업무 태만으로 되어야 할 일이 안 된 것이 아님에도 부당하게 해고를 당했다. 그런데 수습기간, 2개월 차는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근로계약서에는 그럴싸하게 면책 조항을 넣어 근로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게 방치해두었다. 


이 회사의 대표는 꽤나 똑똑하다던데 아마 사업적으로야 잘 풀려 서비스를 존속해나갈지도 모른다. 그런데 회사 속사정을 들여다본 구성원으로서 O2O의 핵심인 기술 대응이 더딘 IT 기업, 기술보다 사람을 갈아 넣어서 할 수 있으면 그게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구조, 회사는 4년 동안 흘러왔는데 사고는 4년 전에 멈춰있는 상황, 예의도 체계도 없이 사람을 뽑았다가 자르는 게 자유로워 잡플래닛 평점이 바닥을 치는 회사. 이런 회사가 내 회사라고, 내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커다란 생각과 계획으로 일했는데 아직은 허무하고 막막한 마음이 크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 이렇게 된 게 나에게는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언젠간 시간이 지나고 봤을 때 결론적으로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길 바란다. 


당분간은 글 쓰며 쉬엄쉬엄 지내고 싶다. 언젠가 다시 취업준비에 목매게 되겠지만 회사를 구하고 다니고 관두는 일 자체가 이제는 조금 버거워졌다. 한 가지 스스로에게 놀란 건 당일에 해고를 통보받는 그 상황에서도 아, 혼자라서 다행이다. 만약 여기에서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있었다면 얼마나 막막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서른에도 무책임할 수 있다는 게 은근 위로가 된다. 언제나처럼 나답게 헤쳐나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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