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름은 보리수 열매
요즘 엄마와 친정집 근처 산책을 하는데, 하천 주변으로 누군가 과실수들을 많이 심어놓았다. 황매실 나무, 무화과나무, 복숭아나무 등등. 열매들이 뒹굴거리기도 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도 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과실을 따다 주워다 냄새도 맡아보는데, 산뜻한 향이 코로 싹 퍼지면서 입에 꼴깍 침이 고이기도 한다.
산책길에 엄마와 약간의 말다툼이 있었다. 나도 남편도 양가에서 첫째라 은근한 부담감이 있다. 엄마를 만난 김에 그것에 대해 얘기를 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양가에서 어련히 잘하겠거니 하며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데 사실 우린 거기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문제는 동생들에게 작은 일 하나라도 생기면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전화해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한다는 것. 그들도 성인이고 부부가 스스로 충분히 해결이 가능한 일인데, 우리를 달달 볶으니 황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큰 일이면야 다 같이 머리 맞대고 고민을 하겠지만, 우리 입장에선 ‘왜 저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해?‘정도의 일이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시동생의 상가 관련 일이었는데, 부동산을 통해서 충분히 해결 가능한 일을 시부모님께서 남편에게 전화해 해결해 달라고 하셨다. 남편이 장남으로서 시댁에서 느낀 서운함에 대해 나도 깊이 공감하던 터라 엄마에게 하소연하듯 털어놓았다. 그런데 엄마는 이미 우리가 아닌 시동생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어린애가 어떻게 해결을 하냐는 식이다. 마흔 다 되어가는 애가 어린애라고오?? 첫째라면 동생들 일에 발 벗고 나서는 걸 으레 해야 하는 일로 생각을 하시기에 속상함과 서운함이 터져 나왔다. 엄마도 둘째여서 첫째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가. 생각해 보니, 양가 부모님들이 다들 둘째 아니면 셋째다. 이 참에 평소에 서운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훑고 지나갔다. 어디 보자, 이 중에 따질 일이 뭔지. 별로 서운하단 감정도 못 느끼던 사소한 일들이었는데, 아이스크림 고르듯 하나하나 골라가며 감정의 불씨에 살살 불을 붙였다.
그렇게 나 혼자 서운함을 토로하며 엄마랑 길을 걷다가 현타가 왔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엄마 옆에 딱 달라붙어서 수발들어달라고 상전 노릇을 하고 있는 건 누구도 아닌 나다. 삼식이한테 세끼 밥 차려주시면서도 딸이 아플까 괜찮을까 종일 전전긍긍하고 있는 엄마다. 나 아니었음 엄마는 진즉에 이모들 만나러 국내 여행을 갔어야 했는데, 내 걱정에 약속도 취소하고 내 옆에 계신다. 그런데 이 철없는 딸은 공감 한 번 못 받았다고 날카로운 말들로 또 은혜를 저버리는 중이다. 사실 동생들 일에 적당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기로 노선을 정해놓고서 크게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었다. 엄마나 시어머니나 변하지 않을 걸 알기에 내려놓은 지도 한참 되었다. 괜히 말 한마디에 발끈하다가 감정의 밑바닥을 보일 뻔했다. 민망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얼마간 침묵 속에 길을 걸었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건 엄마였다.
“어머나 세상에, 여기 파리똥 열매가 있네. 이거 엄마 어릴 적에 많이 따먹었던 건데. 한번 먹어봐.“
“이름이 파리똥이야? 이름 한번 이상하네!”
“원래 이름은 따로 있는데, 엄마 어릴 땐 이 동네에서 다들 파리똥이라고 불렀어. 하얗게 점점이 있는 걸 보고 누가 이름 지은걸 다 따라서 부르기 시작했나 봐.”
옷에 쓱쓱 문질러 건네주시는 파리똥 열매를 맛보았다. 상큼하고 시큼하고 달큼하며 입맛이 화악 도는 맛. 앵두 같기도 한데 먹자마자 과실이 스르륵 없어져 신기루 같다. 이름도 귀여운 파리똥 열매. 언제 화가 났나 싶게 감정도 신기루처럼 사르라니 녹아내린다. 맛있다고 하니 엄마가 손에 한 움큼 따주며 하시는 결정적인 한마디.
“아무도 주지 말고 너만 먹어.“
엄마의 재치에 웃음이 피식 나온다. 내 안의 세 살짜리 어린애가 그 말 한마디에 기분이 다 풀려 헤헤거리고 있지만, 마흔 넘은 여자는 괜한 자존심에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적당한 말들로 감정 포장을 해본다.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고 성질만 부리는 고약한 딸내미에게 매번 먼저 손 내밀어주는 엄마. 가끔 평행선을 달리는 부분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항상 엄마에게 공감해 주는 건 아니다. 촌철살인의 솔직한 말들로 상처 줄 때가 분명히 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모녀싸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티격태격으로 시작한 모녀의 산책은 파리똥 열매를 함께 쥔 손으로 헤벌쭉하게 마무리되었다. 어느 시원하고도 따스한 여름날 저녁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