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이야기]#11
그와 그녀는 언제나 함께였다.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둘이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OT였다. 그가 열 명 남짓한 조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무슨 운명적인 것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쾌활하게 떠드는 그녀의 모습이 남고를 다녔던 그에게는 자신의 지난 삶과 색채를 달리하는 신선한 모습으로 느껴졌다. 다소 내성적이었던 그가 여러 친구들을 사귀며 대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덕이 컸다. 혼자라면 가지 않았을 과방과 각종 행사에 그녀는 잊지 않고 그에게 연락해 같이 가자고 그를 종용하였다. 그로서는 그런 그녀의 행동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어느덧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하게 느껴졌고, 훗날에서야 그 모든 것이 그녀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업을 같이 듣고, 과제를 같이 하고, 마치 한 짝처럼 같이 다니던 그와 그녀가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6년.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가 군대를 갔을 때도 그들은 서로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크게 실감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짧은 며칠간의 여행을 갔다 온 것처럼 2년이라는 공백기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실제 시간과 길이를 달리하였다. 그러니 그가 입대할 때와 제대할 때, 남들이 보기에 신기할 정도로 그들이 무덤덤하게 보였던 것은 그들로서는 전혀 이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였고, 물리적 거리나 시간이 그러한 실감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둘이면서 하나였다.
진동벨이 울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한 음료를 찾으러 갔다. 창문 밖으로는 차가울 것이 분명한 눈이 포근하게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탑승하여 구석구석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음료를 들고 자리로 향할 때, 그녀는 예의 그 장난을 치고 있었다. 시원시원하게 커다란 카페의 통유리가 자신의 스케치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는 입김이라는 물감을 창에 뿌리고 가느다란 손가락 붓을 사용하여 채 1분도 지속되지 못할 명작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그에게는 바라보기 좋은 풍경화였다. 그는 음료가 놓인 트레이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붓질을 따라 해 보았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느끼고 있을 손끝의 냉기가 그의 손끝에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넓은 유리창에 비하면 그녀가 그린 그림은 점처럼 작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흐뭇하였다. 그녀의 불타는 창작열이 두 번째 점을 만들기 시작하자 그는 슬며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그가 음료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기척을 느꼈지만, 예술혼이 불타는 그 시점에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가 조금 기다려주기를 바랐고, 그는 그녀가 그러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둘은 기분이 좋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만들어내는 로맨틱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이 기분이 좋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창밖에 제갈길을 바삐 걸어가는 이들도 둘에게는 순간을 함께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행복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둘은 굳이 행복하다고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서로의 표정에서 그러한 기색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자신의 음료를 들었다. 열정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듯 그녀는 한껏 음료를 들이켰다. 그리고 큰 입으로 활짝 웃으며, 그는 그녀의 큰 웃음을 좋아했다, 말했다.
“맛있다!”
그 말이 그에게는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다. 그녀는 그에게 마셔보라며 자신의 음료를 건넸다. 그는 그 음료가 맛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마시지도 않고 맛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다시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