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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31일 다섯 번째 일기

by 무무

사실, 그렇게 꺄르르 웃은 건 아니지만. 꽤나 길었던 귀향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KTX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서서히 바뀌었다. 맑았던 하늘은 흐려지고, 길가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종착역에 도착할 즈음에는 꽤나 굵은 눈발이 흩날렸다. 역에 도착한 후, 점심으로 먹을 소금빵과 베이글, 크림치즈를 샀다. 배가 고픈 것이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 싶어 곧장 지하철을 타러 갔는데, 그 이동하는 잠깐 나갔던 바깥은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아마 나와 동향일 가능성이 높은 한 군인 청년은 핸드폰으로 풍경을 찍고 있었는데, 어쩐지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원래 남쪽(그중에서도 동쪽)나라 사람은 눈을 보면 좋아할 수밖에 없답니다. 전국에 눈이 온 이번 설, 언제나 ‘눈’에 있어서는 전국에 해당되지 않는 곳이 있으니, 바로 내 고향이다. 요즘은 자조적으로 노인과 바다라고 불리긴 하지만, 바다와 낭만이 공존하는 도시다. 나를 포함해서 내 주변의 동향 사람들은, 지금은 일자리를 찾아 어쩔 수 없이 떠나왔지만 언젠가 노년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길 생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사람은 적지만 인프라도 충분하고, 산과 바다 모두를 즐길 수 있어서려나. 뭔가, 까칠한 듯 다정한 매력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뉴스와 SNS에서는 온 세상에 발목까지 눈이 쌓였다고 난리였는데, 내가 있는 곳의 하늘은 파랗기만 했다. 대신에 지독한 추위가 오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완전히 걷힌 하늘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러니 서울에 도착해서 내리는 눈을 봤을 때, 얼마나 이질적이었겠는가. 한국이 이렇게 넓나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 근처 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기까지 5분 남짓. 가방 앞지퍼에 우산이 있었지만 그냥 맞고 갔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눈사람이 따로 없었는데, 실없이 그 모습이 웃겨 웃음이 났다.


서울에 꽤나 오래 살며 매 겨울 눈을 봐 왔지만, 아직도 나는 눈이 좋다. 교통체증이나 미끄러움, 질척거림 같은 단점을 다 감내하면서 말이다. 비는 습해서 싫어도, 눈은 뽀송해서 좋다. 녹기 전에 툭툭 털어내면 딱히 흔적이 안 남기도하고. 하얗게 쌓인 눈을 밟을 때, 질 좋게 내린 눈이 신발 사이에 끼여 내는 뽀드득한 소리와 느낌은 이상하리만치 만족스럽다. 눈이 내릴 때 살짝 포근해지는 날씨와 소복이 쌓인 눈은, 마치 눈이 이불이 되어 세상을 덮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더 얘기해 보자면, 내게는 기억에 남는 눈에 대한 추억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향에서 만난 첫 폭설.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어렸던 어느 해의 3-4월. 그러니까 봄이 거의 오기 직전에 한 번, 동네에 폭설이 내린 적이 있었다. 이례 없는 폭설인지라 눈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기에, 모든 교통은 멈췄고 온 도시가 마비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 했다. 우리 집도 그랬다. 나는 그때 무작정 신이 났다. 아버지와 사촌의 손을 잡고 당시에 살던 4층짜리 빌라 옥상에서, 내 종아리까지 온 눈을 모아 다 함께 눈 소파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쿵 하고 앉으니 그 부분만 엉덩이 모양으로 쑥 들어가서 보강을 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는 없을 추억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말 오랜만에 봤던 폭설. 대입을 준비하며 내내 고향에 있다가, 대학에 들어오며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기숙사는 인천 쪽에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유독 겨울이 긴 동네였다. 그때도 세상이 하얬던 걸로 기억한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서 사는 경험이었고, 그것도 꽤나 혼자 동떨어졌던지라. 유독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았다. 3인실 기숙사에서 창밖으로 보이던 그날의 새하얀 풍경,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 맞이할 변화에 대한 두려움, 약간의 외로움과, 조금의 걱정. 부끄럽지만 찔끔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하면 귀엽기도, 안쓰럽기도 한 나다.


뭐 아무튼, 눈은 겨울에만 볼 수 있으니 오늘의 웃음은 겨울 한정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정판 웃음이라고 하니까 어쩐지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 내일도 웃을 일이 생기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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