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버킷리스트, 아이와 삼국지기행 떠나기
마취도 하지 않은 팔을 칼로 가르고 드러난 뼈를 벅벅 긁는다. 시퍼렇게 독으로 물든 뼈를 칼로 긁는 와중에도 당사자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둔다. 명의는 뼛속 독을 무사히 제거하고 명장은 82근 칼을 다시 들고 전장으로 향한다. 명의와 명장의 만남은 이렇게 전설을 만들어 냈다.
<삼국지연의>의 명장면 중 하나인 괄골요독(刮骨療毒) 이야기이다. 삼국지의 주인공 중 하나인 관우 운장은 조조의 인척인 조인과의 번성전투에서 독화살에 맞고 만다. 독이 팔에 퍼지고 생명이 위급할 수도 있는 상황. 이때 등장한 삼국지 최고의 명의 화타. 화타는 독을 제거하기 위해 칼로 살을 째고 뼈의 독을 제거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마취기술이 없었기에 기동에 팔을 묶어서 수술을 하자고 하는 화타. 하지만 우리의 관우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며 참모인 마량(그 유명한 ‘백미’ 고사의 주인공. 동생도 그 유명한 ‘읍참마속’의 마속)과 웃으며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신다. 그동안 생살을 째고 뼈를 긁어내는 수술이 진행되지만 관운장은 이를 웃으며 견뎌낸다.
삼국지연의 특유의 과장이 섞인 이 일화는 관우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평생 보여줬던 관우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이면에서 슬쩍 비치는 교만함은 이후 형주에서 관우의 운명이 마무리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화타의 치료를 받고 전장으로 돌아간 관우는 결국 조인에게 패배하고, 손권의 오나라 계책에 빠져 최후를 맞이한다.
실제로 관우가 화살을 맞고 치료를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화타가 관우를 치료해 준 것은 소설이다. 관우가 번성전투를 치를 당시 이미 화타는 사망했기 때문. 그리고 괄골요독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관우가 태연하게 바둑을 두었다는 소설의 내용 역시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 마취 없이 뼈 수술을 견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관우의 허언증짤(하단에 허언증짤 첨부) 덕분에 희화화되고 있지만, 관우가 보여준 기개와 용기는 지금까지 회자가 되고 있으며, 아직도 중국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기념관과 사당이 존재한다.
삼국지에 대한 나의 덕력에 대해 이전 글들에서 밝힌 바 있다. ( 이전 글 링크: 삼국지 빠지게 된 계기, 삼국지 게임과 소설 ) 수년 전 대만 여행을 갔을 때, 관광지 어디선가에서 우연히 들른 기념품 가게에서 맘에 드는 피규어를 발견하게 된다. 관우가 귀엽게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피규어는 맘에 쏙 들었고, 지금도 그때 샀던 '돈신'과 함께 연구실 책상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
관우가 수년간 곁을 지켜서일까? 관우 운장의 기운이 이제 33개월이 된 우리 아들에게 전달된 듯하다. 갑자기 웬 뜬구름 잡는 소리냐고?
33개월 우리 아들은 내성발톱이 있다. 엄마는 아빠의 열성 유전자를 이어받아 그렇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발톱이 자주 깨져 곤란한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지난 주말 글램핑에서 무리를 해서인지 종종 탈이 나던 엄지발톱이 상당히 곪아 있었다. 육안으로 봐도 고름이 차있고, 빨갛게 부어 있어 걸어 다니는데 고통을 호소하는 상황.
지난 월요일 아침, 급히 정형외과에 아이를 데리고 간다. 평소 가던 소아과가 아니어서인지 두리번거리며 두려워하는 녀석. 정형외과의 온갖 기구들을 보며 자기는 저 기구 안 쓸 거라며 벌써부터 선을 긋는다. 아빠 아야 하냐고 물어보며 아빠가 저 기구를 쓰고,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벌써 꾀를 부리고 있다. 그렇게 정형외과 탐색이 끝나고 의사 선생님의 진찰이 시작되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이의 발톱을 보자 하는 말.
"마취하고 째야겠는데요"
"그런데 어려서 부분 마취도 안 되고, 전신 마취는 무리고."
"그냥 살살 고름 부위를 잘라서 처치를 합시다."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손톱이나 발톱 옆에 염증이 생겨 빨갛게 부어오르기만 해도 상당히 아프다. 육군 훈련소 시절 손발톱에 염증이 자주 나서 군의관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입장에서 그 고통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이다. 그런데 아이가 쌩으로 발톱 옆 생살을 찢은 다음에 고름을 뺀다고?
관우가 고통을 잊기 위해 마량과 바둑을 두었던 것처럼, 아빠는 아이에게 뽀로로를 틀어준다. 의사 선생님은 화타가 된 것처럼 아이의 발톱을 잡고 시술을 준비한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관우가 아니었다. 아니 관우보다 더 현실을 직시했다. 마량이 바둑을 두며 관우의 정신을 돌린 것처럼 아빠는 뽀로로를 틀어주었지만 아들은 뽀로로를 안 본다. 그 좋아하는 언제나 즐거운 개구쟁이 뽀로로를 보지 않고 본인의 엄지발톱을 직시하는 녀석. 그렇게 시술이 시작되고 살을 째고 고름을 빼는데도 울지도 않고 소리도 안 내고 자기 엄지발톱만 보고 있다. 뽀로로가 나오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아빠도, 옆에서 아이를 잡고 있는 간호사도, 시술을 하는 의사 선생님도 감탄을 금치 못하는 광경이었다. 아빠 연구실 책상에서 관운장이 몇 년간 눈웃음을 치며 아빠를 보고 있어서였을까.
관운장님, 여기 당신의 기운을 이어받은 아이가 있습니다!
다시 시선을 관운장의 괄골요독이 있었던 형주로 돌려보자. 형주의 중심에는 관우가 화타에게 시술을 받았다고 알려진 장소에 병원이 들어서있다. 그리고 그 병원의 한가운데에는 관우가 화타에게 시술을 받으며 바둑을 두는 장면을 묘사하는 조각상이 있다. 바로 이 자리가 관우가 수술을 받았던 자리이고, 관우가 병이 나은 것처럼 환자들의 쾌유를 기원하며 병원이 들어선 것이다.
또한, 화타의 고향인 박주라는 곳에는 화타를 기리는 사당과 묘가 있다. 화타에 대한 존경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져 당나라 시기 사당이 세워지고, 훗날에는 이 사당을 화조암이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화타의 묘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건강을 기원하는 향불을 켠 흔적이 보인다.
이처럼 관우와 화타 이야기를 단순 소설이 아닌 현장에서 체험해보고 싶지 않은가? 삼국지를 역사로 공부하고 소설로 읽는 것 이상의 감동을 현장에서 느껴보고 싶다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렇게 추가된 나의 새로운 버킷리스트(100개가 넘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바로 삼국지의 장면을 현장에서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역사에 나왔던 명소들. 유관장 삼 형제가 도원결의를 맺은 곳, 적벽대전의 현장, 공명의 마지막 장소 오장원 등을 직접 투어 해보고 싶은 것이 늘 이야기하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다.
막연한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삼국지 버킷리스트를 현실화시켜 줄 가이드를 최근 우연히 찾게 되었다. 파주 출판단지에 놀러 갔다가 발견하게 된 책 '삼국지 기행'이다. (역시나 내돈내산 후기이다. 또한 관우와 화타 이야기와 어우러지는 현장 사진들 역시 '삼국지 기행' 책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
허우범 인하대 초빙교수가 쓴 책인 '삼국지 기행'은 저자가 20여 년에 걸쳐 중국 전역의 삼국지 현장을 답사하며 쓴 책이다. 삼국지 작품 속 영웅들이 활약을 펼쳤던 중국 명소들을 소개하고, 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살펴보며 '삼국지'에 대한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전달해 준다. 총 2권으로 구성된 책으로 이미지와 이야기가 어우러져서 일반 삼국지와는 다른 색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삼국지 기행'을 읽어보니 버킷리스트가 구체화된다. 또한 여행에 함께할 사람도 떠오른다. 바로 관우의 기상을 이어받은 우리 아들이다. 아빠의 취향을 강조할 마음은 전혀 없지만, 자연스레 아빠가 좋아하는 삼국지를 접할 가능성이 높은 우리 아들. 관우의 기상까지 이어받았으니 왠지 삼국지 역시 좋아할 것 같다. 그리고 좀 크게 된다면 함께 삼국지 기행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삼국지의 명소 중 다수는 관광객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곳이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오지를 찾아가기는 무리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삼국지의 주 무대인 낙양이나 장안, 성도와 같은 대도시만 둘러보더라도 안전한 삼국지 기행이 얼추 가능할 것이다. 장안성을 거닐고 성도에서 촉한의 흔적을 찾아보는 일은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다.
언젠가 아들과 함께할 삼국지 기행을 상상하며 조금씩 여행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그전에 삼국지를 접하게 할 방법부터 생각해야겠지만.
추신)
발가락 치료에 전념 중인데 뜬금없이 아빠의 여행 계획에 동참하게 될 아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며, 글 서두에 언급한 관우의 허언증짤 올려드립니다. 글이 최초 올라온 곳은 디시인사이드의 '허언증 갤러리'입니다. 이 글이 인터넷에서 많이 퍼지며 관우를 희화화하는데 큰 일조를 하였죠. 다만 글빨이 너무 좋아 자꾸자꾸 보게 되는 마성의 글입니다. 마지막 삼삼은 화룡점정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