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가 더 많아진 모임 서로의 지나온 그리고 지나가야할 길들을
비가 내리는 어느 날, 거의 1년 만에 옛 동료들을 만났다.
퇴직 후의 만남이라 그런지, 모두의 두 손은 무거웠다.
누군가는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과 향긋한 커피를 들고 왔고, 또 누군가는 집에서 직접 구운 수제 과자를 담은 상자를 가져왔다. 한 동료는 화장품 세트를 정갈하게 포장해 와서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나는 정성껏 만든 보리막장을 들고 갔다.
"어휴, 뭐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윤정이 내 손에 들린 보리막장 병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들도 다 이렇게 손 무겁게 왔잖아." 내가 웃으며 말했다.
미영이 수제 과자 상자를 열며 말했다. "퇴직하고 나니까 시간이 많아져서 이런 거 해볼 시간이 생기더라고. 예전엔 상상도 못 했지."
이렇게 서로의 정성이 담긴 선물을 나누며 우리는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커피 향이 품어지는 테이블 위로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어제 문자 받고 너무 반가웠어. 진짜 1년이 훌쩍 지났네." 수진이 말했다.
동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퇴직하고 나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 너희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
"그런데 요즘 세상이 참 빨리 변하네." 동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얼마 전에 마트 갔는데, 계산대가 다 무인이더라고. 난 아직도 그런 기계 앞에서 허둥지둥해."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요즘 AI니 뭐니 하는 것들 때문에 우리 자식들 세대는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걱정 마, 사람은 항상 적응하는 법이야." 윤정이 말했다. "우리도 처음 회사에 컴퓨터 도입될 때 얼마나 당황했었어? 그래도 다 잘 배우고 적응했잖아."
"맞아. 세상이 변해도 결국 사람이 중요한 거지." 내가 말을 이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 같은 인간관계의 소중함은 변하지 않을 거야."
미영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가 이제 그치는 것 같네. 우리 다음에는 좀 더 활동적인 걸 해볼까? 등산이라든지."
"등산?" 동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무릎이 버틸지 모르겠는데."
"괜찮아, 천천히 가면 돼. 우린 이제 서두를 필요 없잖아." 윤정이 말했다.
"그러게, 퇴직의 좋은 점이 바로 그거지.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거." 내가 덧붙였다.
수진이 갑자기 시계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벌써 이렇게 됐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시계의 바늘은 서너 시간을 훌쩍 넘어갔다.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처럼 놀라워하며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단순한 회사 동료가 아니었다. 젊음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며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나눈 전우들이었다.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고, 힘든 날에는 위로가 되어주었던 사람들. 회사라는 전장에서 함께 싸우고, 웃고, 울었던 진정한 전우들. 그래서인지 오늘의 만남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헤어질 시간이 되어 우리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비가 그치고 창밖의 하늘이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습한 공기가 우리의 얼굴을 감싸안았다.
"다들 건강해야 해. 아프지 말고." 동석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앞으로 정기 검진 꼭 받고." 윤정이 모두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 또 만나자.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고." 미영이 말했다.
수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안했다. "앞으로도 가끔, 하늘이 이렇게 회색으로 빛날 때 만나자. 뭔가 오늘 같은 날씨가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우리는 모두 그 제안에 동의했다. 인생의 봄과 여름을 함께 보낸 우리에게 이제 가을비가 내리는 회색 하늘이 더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포옹을 나누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각자의 차로 흩어지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감사함이 차올랐다. 이런 인연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에 맺힌 물방울 사이로 도시의 불빛이 산란되어 빛났다. 그 모습이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 느껴졌다. 각자 다른 곳에서 빛나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어내는.
퇴직 후의 삶은 때로 고요하고, 때로는 낯설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행자들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만들어낸 전우애는, 앞으로도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마다, 나는 그들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기다릴 것이다. 다시 회색 하늘 아래에서 만날 그 순간을, 우리가 다시 어린아이처럼 웃을 그 날을.
이제 우리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서두를 필요도 없고, 경쟁할 필요도 없다. 그저 가끔, 하늘이 회색빛으로 물들 때, 손을 무겁게 하고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여전히 인생이라는 여정의 든든한 동행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