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를 열었다. 빈 페이지 위에 커서가 깜빡인다. 작은 빛이 자꾸만 내 시선을 붙잡는다. 살아있다는 증거를 자꾸만 보여주려는걸까 심장이 토닥거린다.
파일 이름: 2000년 11월 주민복지정책 분석 및 민원 처리 현황 보고서_작성자.docx
손가락이 키보드로 천천히 내려간다. 첫 글자를 친다. 그 순간 세상이 열린다.
주민 복지 정책 분석.
문장이 화면에 나타난다. 내가 만드는 문장. 내가 선택하는 단어들. 어떤 통계를 먼저 보여주고, 어떤 정책 근거를 뒤에 둘지. 모두 내 손가락의 선택이다.
자료를 찾고 분석하고 비교하는 건 올곶이 나의 몫이다. 표를 만든다. 한 줄씩 숫자를 입력한다. 각 칸에 의미를 담는다. 이것은 누군가의 민원이고, 저것은 정책의 결과이고, 또 다른 것은 내년을 위한 기초 자료다.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 손가락의 장단에 맞춰서 춤추는 키보드. 쓰고 지우기를 오전시간내내 하였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곧 오는 것처럼
휴게실에 가려다 말았다. 모니터 앞에 앉은 채로 시간이 흐른다.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것은 오후 1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사무실은 반쯤 비었다. 누군가는 돌아오고, 누군가는 아직도 밖에 있다.
화면에 통계 수치들이 떠 있다. 정책 근거. 분석 의견. 내 이름. 날짜.
손가락이 계속 움직인다.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멈춰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마치 지구의 종말이 다가온 것 처럼
갑자기 훅 불어오는 바람에 실여 왔을까 그사람이 컴퓨터 화면을 차지하고 서있다
그 순간 손가락은 장렬하게 전사해 키보드 위에 떠 있다.
11월이었다. 정확히는 11월 15일이었다. 날씨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침에는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하고, 점심때는 햇빛이 따뜻했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차가워진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중간 어디쯤 우린 서 있었다
자꾸만 차가움쪽으로 움직이는 당신을 난 잡지 못했다
아무말도 못하고 보냈는데 왜 무엇 때문에 왔을까
얼마를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 뭐해 왜 멍 때리고 있어? 밥은 먹은거야” 동료의 말 때문에 그사람은 사라져 버렸다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런가 ㅎㅎㅎㅎㅎ
무의식의 의식 속에서 손가락이 다시 움직인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 이 시간, 이 오후 2시쯤에. 혹시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고 있진 않을까. 혹은 회의실에서 누군가 앞에서 발표를 하고 있진 않을까. 아니면 내처럼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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