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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성 우울증의 침묵과 외침

벌겋게 울던 눈


소리 없는 눈물

요양병원 208호실. 모든 것이 자립 가능하고 인지가 또렷한 김순자 할머니는 언뜻 보기에 그저 평범한 노인이었다. 피부암을 앓고 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진단명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그녀의 눈빛에서 무언가 다른 점을 발견했다. 생기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눈, 힘없이 드리워진 어깨,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고통.

아침부터 눈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 활발하던 그녀가 온몸에서 기운이 빠진 듯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어르신, 눈에 힘이 하나도 없네요.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야, 괜찮아." 짧은 대답과 함께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슬픔이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아무리 햇빛이 비춰도 결코 밝아지지 않는 깊은 우물처럼.

점심시간, 여전히 그녀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다른 환자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밥그릇에는 손도 대지 않은 흰 쌀밥만 남아있었다.

"어르신,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괜찮아, 고마워."

다시 돌아온 똑같은 대답.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아무것도 '괜찮지' 않다는 신호가 가득했다. 갑작스런 불안감에 간호사실로 달려갔다. 김순자 할머니의 상태를 설명했지만, 담당 간호사는 무덤덤하게 진통제 한 알을 건네고는 돌아섰다. 아마도 이전에도 반복된 일상이었던 듯했다.

어쩌면 내가 너무 민감한 걸까? 그저 노화의 한 단면을 과하게 해석하는 걸까? 그런 생각도 잠시, 퇴근 무렵 208호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해 들어섰을 때,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했다.

침대 위에서 김순자 할머니는 홀로 누워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주름진 뺨 위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눈가는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슬픔이 강물처럼 터져 나온 듯했다.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병원 복도에서 들려오는 면회객들의 웃음소리, TV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음악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침묵의 심연

노인 우울증은 침묵의 병이다. 그것은 청년기의 우울증처럼 격렬한 울음이나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대부분 체력 저하, 식욕 감퇴, 수면 장애 등의 신체적 증상으로 위장된다. 그래서 많은 의료진들은 이를 단순한 노화 현상으로 오인하곤 한다.

김순자 할머니의 우울증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병원 기록을 살펴보니 그녀는 1년 전 남편과 사별했다. 55년을 함께한 반려자의 죽음은 그녀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였을 것이다. 게다가 사별 후 3개월 만에 피부암 진단을 받았다. 육체적 고통과 상실의 아픔이 동시에 그녀를 덮친 것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그녀에게 세 명의 자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면회 기록부에는 한 달에 한 번, 많아야 두 번의 방문 기록만 있었다. 대부분 짧게 들렀다 가는 형식적인 방문이었다. 전화는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5분 내외로 짧게 끝났다.

노인 우울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 '관계의 단절'이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아온 노인들에게 자녀들의 무관심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일 수 있다.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사라졌다는 느낌, 더 이상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책감이 그들을 깊은 우울의 늪으로.

"어르신, 아프지 마세요. 내 마음이 너무 아파요. 알았죠? 울지 말고 주무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나오는데, 동료 직원들의 충고가 이어졌다.

"김 할머니는 무조건 모른 체하는 게 좋아요. 건들면 며칠을 울고 불고 난리를 쳐요. 우리도 힘들고 본인도 더 힘들어져요."

그 말에 가슴이 더 아팠다. 우울증은 단순히 '마음이 슬픈'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또는 표현해도 공감받지 못할 것이라 단념한 영혼의 비명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약 15-20%가 우울증을 경험하지만, 실제로 진단과 치료를 받는 비율은 10% 미만이다. 특히 요양병원에 입원한 노인들의 우울증 발병률은 일반 노인보다 2배 이상 높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료 환경에서 이는 '치료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곤 한다.

김순자 할머니처럼 신체적으로 자립이 가능하고 인지 기능이 정상인 환자들의 정신 건강은 더욱 간과되기 쉽다. '걸을 수 있고', '밥을 먹을 수 있고', '대화가 가능하면' 그들은 '괜찮은' 환자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 겉모습 아래 얼마나 깊은 절망이 자리하고 있는지, 얼마나 고독한 밤을 보내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피부암이라는 신체적 고통도 견디기 어렵지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아마도 자신의 슬픔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이 들 때까지, 그녀의 모든 감정은 오로지 그녀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였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관계의 단절은 육체적 고통 이상의 상처를 남긴다. 노인성 우울증 환자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아픈 것보다 외로운 게 더 견디기 어려워요."

무력감의 크기

요양병원 직원들의 현실도 녹록지 않다. 한 명의 요양보호사가 평균 10-15명의 환자를 담당하는 현실에서, 모든 환자의 정서적 필요까지 세심하게 살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물리적인 케어—목욕, 식사, 투약, 기록—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하다.

김순자 할머니의 눈물을 마주한 그 순간, 내 안에서는 두 가지 감정이 충돌했다. 한편으로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 그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진심 어린 연민. 다른 한편으로는 '개입했다가 상황이 더 악화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과 '내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

"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과 치료가 아닐까? 하루를 살아도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제약도 분명했다. 요양병원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고,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많은 가족들은 이를 '불필요한 지출'로 여기거나, '나이 들면 다 그렇지'라며 가볍게 넘긴다.

요양병원 직원들은 이러한 구조적 한계 속에서 무력감을 경험한다. 눈앞에서 고통받는 환자를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라는 현실이 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는 종종 '공감 피로'로 이어져 결국 자기 방어적인 태도—"무조건 모른체하자"—로 귀결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고통 앞에서 '모른 체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일까? 나의 최고 장점이 상담인데, 그것을 활용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오지랖 넓히지 말고 조용히 있자' 라는 자기 검열이 뒤따랐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김순자 할머니의 붉게 울던 눈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픈 마음을 혼자서 만진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저 가만히 안아만 줘도 될 것을,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바라봄의 힘

노인성 우울증은 우리 사회의 침묵된 재앙이다. 노인 인구가 급증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과제가 되었다. 특히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소한 노인들의 정신 건강은 긴급한 관심이 필요한 영역이다.

김순자 할머니의 눈물은 단순한 슬픔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 사회 구조에 대한 질문이자 경고이다. 그것은 '돌봄'이라는 개념을 육체적 필요 충족에만 한정하는 현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낸다.

진정한 돌봄은 물리적 케어를 넘어, 정서적 필요까지 포용하는 전인적 접근을 요구한다. 그것은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여 주는 것만큼이나,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감정을 인정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노인 우울증의 치료는 약물이나 상담 같은 의학적 개입도 중요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치료는 '관계의 회복'이다. 가족, 친구, 의료진, 사회와의 연결감을 되찾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재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김순자 할머니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노인들의 육체적 생존만 중요시하고, 그들의 영혼의 필요는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가? 효율성과 비용 절감이라는 명목 하에, 인간 돌봄의 본질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언젠가 그 자리에 있게 될 때, 어떤 돌봄을 받고 싶은지 진지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준 것

자식의 도리라는 말은 오래된 가치관이지만, 그 본질은 시대를 초월한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부양이나 정기적인 방문이 아니라, 부모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그들의 필요에 진심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김순자 할머니의 자녀들은 한 달에 한두 번 요양병원을 방문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효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병원비를 내고, 간식을 사오고, 짧게나마 안부를 묻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효는 그 이상이다. 그것은 부모의 감정에 귀 기울이고, 때로는 그 감정이 불편하더라도 함께 감내하는 것이다. 특히 노인 우울증을 겪는 부모에게는 '시간'이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그저 곁에 앉아 손을 잡고, 그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우리 부모세대는 전쟁과 가난을 겪으며 자식만을 위해 살아온 세대다. 그들은 자신의 꿈과 욕망을 희생하며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그들이 노년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어떤 보답을 해야 할까?

물론 현대 사회에서 자녀들도 각자의 삶에 바쁘다. 직장과 자신의 가정을 꾸려나가며 부모를 매일 돌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주' 보는가가 아니라, '어떤 질'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가이다.

한 시간의 진심 어린 대화가 형식적인 열 번의 방문보다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전화 통화 중에도 진정으로 경청하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는 태도는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연결감을 제공한다.

또한 요양원이나 병원에 모신다고 해서 자식의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는 더욱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직원들과의 소통을 통해 부모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추가적인 의료 서비스(정신과 상담 등)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붉은 노을을 바라보면 가로등 밑에서 나에게 수줍게 주었던 붉은 장미가 떠오르고, 불타는 태양을 바라보면 타오르는 태양 속에서 나를 찾았던 젊고 활력에 넘치던 나의 모습을 봅니다. 지금은 발가락의 힘이 줄어든 우리 부모님들도 한때는 그렇게 열정 가득한 청춘이었다.

이 모든 시간들과 동행하는 사랑. 때론 빗 속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우산이 되어 주고, 눈 오는 날 손장갑이 되어 주고, 바람 불어 옷자락 날리면 다가와 안아 주던 부모님의 사랑.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그 사랑을 돌려줄 차례이다.


"주 나의 모습 보네, 상한 나의 맘 보시네. 주 나의 눈물 아네, 홀로 울던 맘 아시네. 신이 있다면, 정말 있다면 안아 주시겠지 가만히. 주무시지도 않고 눈동자처럼 당신의 자식들을 지키고 계시니."


그렇게 우리의 부모님도, 김순자 할머니도, 모든 노인들도 더 이상 혼자 울지 않는 세상을 꿈꿔본다. 그들의 벌겋게 울던 눈이 다시 한번 행복으로 빛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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