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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어머니의 외침

어제가 우리 손주 돌이었어


기다림의 무게

창백한 형광등이 드리운 요양원 식당에서 그날따라 유독 빛나는 얼굴이 있었다. 진한 주름이 패인 94세 김정순 할머니의 얼굴에 오랜만에 핏기가 돌았다. 바짝 마른 몸은 여전했지만, 흐린 안개 같던 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평소 말이 없고 점잖으신 그분이 오늘은 유난히 상기된 표정으로 떨리는 손을 흔들며 주변 어르신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계셨다.

"우리집에 떡 먹으러 와. 우리 손주 돌이야. 어제 떡 해서 마을 사람들하고 나눠 먹었어."

쪼글쪼글한 손으로 떡을 나눠주는 시늉을 하시며 할머니는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셨다. 그 미소에는 할머니의 온 생애가 깃들어 있었다. 평생 자식을 위해 살아온,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어머니의 마지막 기쁨.

주변 어르신들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 기쁨에 동참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도 그 환상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잠시나마 행복한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어르신, 손주 돌이에요?"

"응, 얼마나 이쁜지 몰라. 첫돌 상에 연필도 올려놓고, 돈도 올려놓고... 우리 손주 연필 집더라고. 아이고, 의사 될 거야. 똑똑해."

할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분명 기쁨의 눈물이었지만, 그 속에 스민 애잔함이 가슴을 저몄다.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아련함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어제 정말로 손주의 돌잔치가 있었던 것처럼, 그 기억이 너무나 생생한 듯이 말씀하셨다.

나는 짧게 대꾸했다. "어르신, 저도 떡 좀 주세요. 조금 있다 올게요."

복도를 걸어 간호사실로 향하며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여전히 손주 이야기에 빠져 허공에 대고 손짓하며 웃고 계셨다. 그 웃음이 칼로 가슴을 갈라놓는 듯했다. 돌상에 앉아 있는 손주를 설명하는 할머니의 떨리는 손가락, 자랑스러움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할머니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환영이었다.

할머니의 손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4년 전, 외동아들 김민수는 어머니를 이곳에 모셔놓은 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매달 요양비 통장에 돈만 부쳐질 뿐, 어머니를 보러 오는 발걸음은 끊어진 지 오래였다. 손주는 그저 할머니의 머릿속에만 살아있는 환상이었다. 평생 가슴에 묻어두었던 바람이 치매라는 병을 통해 환영으로 피어난 것이었다.

할머니의 병실 침대 옆 작은 서랍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고이 놓여 있었다. 오래전 어린 시절 아들의 사진이었다. 구석이 닳고 바랜 사진 위에는 지문자국이 선명했다. 할머니가 매일 밤 그 사진을 어루만지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간호사실에 도착해 동료에게 물었다.

"김정순 할머니, 오늘 왜 손주 돌잔치 이야기를 하시죠?"

"아, 오늘이 그날이에요. 매년 음력 9월 15일이면 그러세요. 아들의 생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날만 되면 손주 돌잔치 이야기를 하세요."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아들의 생일에 손주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 자신을 잊은 아들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깊으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을 환상 속에서라도 이루고자 했을까. 그 애절한 사랑 앞에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피를 토하는 그리움

김정순 할머니는 4년 전 이곳에 입소했다. 외동아들 김민수 씨가 직접 모셔왔지만,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요양원을 찾지 않았다. 매달 요양비는 정확히 입금되었지만, 어머니를 보러 오는 발걸음은 끊어졌다.

할머니의 방에는 아들 가족 사진이 하나 놓여 있었다. 때가 묻고 빛바랜 사진 속에는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아들이 웃고 있었다. 할머니는 매일 밤 그 사진을 베개 옆에 두고 주무셨다. 가끔 밤중에 순찰을 돌다 보면 할머니가 사진을 품에 안고 잠든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우리 아들이 오늘 올 거예요. 어제 전화했어요."

매일 아침, 할머니는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처음에는 직원들도 "그러시겠죠"라며 맞장구를 쳐드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대답이 점점 무거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말을 돌리거나, 모른 척하게 되었다. 그 거짓말에 동참하는 것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치매는 중증이 아니었다. 대소변은 스스로 해결하셨고, 과거의 기억도 상당 부분 또렷했다. 다만 현재와 과거가 뒤섞이는 일이 잦았다. 40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말씀하시곤, 손주의 돌잔치 이야기처럼.

그러나 할머니의 몸은 매일 피를 토하듯 무너져갔다. 입소 당시 50kg이었던 체중은 이제 35kg으로 줄었다. 가늘어진, 아니 앙상해진 팔다리는 마치 새의 뼈와 같았다. 얼굴의 피부는 종이처럼 얇아져 햇빛에 비치면 투명하게 보였다.

가장 가슴 아픈 모습은 매주 토요일 오후였다. 할머니는 그날만큼은 꼭 머리를 손질하고, 옷을 갈아입으시고, 작은 의자를 끌고 현관 로비로 나오셨다. 출입문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문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르신, 춥지 않으세요? 방으로 들어가시죠."

"아직 안 돼. 우리 아들이 오기로 했어."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겨울날에도, 땀이 줄줄 흐르는.여름날에도, 그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해가 져서 어둠이 내리면,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셨다. 그 뒷모습이 얼마나 처연했는지.

어느 겨울날, 할머니가 갑자기 고열로 쓰러지셨다. 폐렴이었다. 위독하다는 판단에 아들에게 연락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자 '일이 바빠서 갈 수 없으니 최선을 다해 치료해달라'는 답변과 함께 병원비 계좌가 왔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병원 침대에 누워계신 할머니는 혼수상태에서도 계속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민수야... 민수야..."

그 소리가 가슴을 찢었다. 외동아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어머니가 죽음의 문턱에서도 그 아들을 찾는 모습이, 숨이 멎을 듯 아팠다.

기적적으로 할머니는 회복되셨지만, 그 이후로 더 말수가 줄었다. 토요일 기다림도 그만두셨다. 대신 밤마다 베개를 적시는 울음소리가 복도까지 들려왔다. 나는 가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함께 울었다.

할머니의 과거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남편은 공무원이었지만 50대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홀로 외동아들을 키우기 위해 할머니는 식당일, 청소일, 장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으셨다. 아들을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고, 그 결과 아들은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우리 아들이 바빠서 그래. 그 애가 그런 애가 아니야."

할머니는 아들을 원망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바쁜 아들을 이해하고 변호하셨다. 누군가 아들의 무심함을 지적하면 화를 내시기까지 했다. 4년간 얼굴도 보이지 않는 자식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피를 토하게 했다.

어느 날, 할머니의 방을 청소하다 침대 밑에서 작은 봉투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수십 장의 편지가 있었다. 모두 아들에게 쓴, 그러나 보내지 못한 편지들이었다.

"민수야,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구나. 바쁘다는 거 알아. 그래도 얼굴만이라도 보여주면 좋겠다..." "민수야, 어제 꿈에 네가 나왔어. 어릴 적 모습 그대로... 그때가 그립구나..." "민수야, 어머니가 아프지만 걱정하지 마라. 어머니는 괜찮다. 너만 잘 지내면 돼..."

편지마다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깊었는지, 그 흔적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직원의 눈물: 무력한 목격자

요양원에서 일하는 우리는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노인들과 보낸다.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는 우리는 자연스레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게 된다. 김정순 할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아픔을 지켜보는 것은 매일매일이 고통이었다. 아들을 기다리는 토요일 오후, 밤마다 흐느끼는 소리, 매일 아침 희망에 찬 눈으로 "오늘 우리 아들이 온대요"라고 말하는 모습. 그 모든 순간이 칼로 가슴을 에는 듯했다.

"선생님, 우리 아들한테 전화 한 통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아픈 것 같아서요."

이런 부탁을 받을 때마다 어떤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의 간절함 앞에서 나는 매번 무력했다.

한번은 용기를 내어 할머니의 아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많이 그리워하시니 한 번만 찾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대답은 차가웠다.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거기 계신 이유가 있잖아요. 제가 직접 돌볼 수 없으니까요. 돈은 꼬박꼬박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돈으로 환산하는 그 냉정함이 이해되지 않았다. 94세,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를 4년간 한 번도 보지 않는 마음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직원들은 할머니의 생신에 작은 파티를 열어드렸다. 케이크를 사고,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할머니는 그날 정말 행복해하셨지만, 문득 "우리 아들도 내 생일 알고 있을까?"라고 물으셨을 때, 모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가끔은 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어르신, 아드님이 전화하셨어요. 다음 주에 꼭 오신대요." 이런 위로가 옳은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았지만, 잠시나마 환하게 웃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 그 죄책감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우리는 때로 가족이 아닌 타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느낀다. 노부모를 모시는 것은 결국 자식의 몫이고, 우리는 그저 그 빈자리를 임시로 메우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할머니를 지켜보며 흘리는 우리의 눈물은 진심이었다.

잊혀진 사랑의 무게

어제, 김정순 할머니는 또다시 손주의 돌잔치 이야기를 하셨다. 떡을 나눠먹은 이야기, 손주가 무엇을 집었는지, 얼마나 예쁘게 웃었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주셨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손주, 찾아오지 않는 아들과 함께하는 환상 속 행복이 할머니의 유일한 위안이 되고 있었다.

현실은 비참했다. 94세 노모를 4년간 외면한 아들. 요양비는 내지만 발걸음은 끊어진 관계. 그럼에도 그 아들을 끝끝내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 그 모든 것이 한 편의 비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피를 토하는 그리움, 눈물로 지새운 밤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나날들. 그것이 김정순 할머니의 마지막 나날이었다. 아무리 치매가 진행되어도 그 그리움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져, 환상 속에서라도 아들과 함께하는 행복을 꿈꾸게 만들었다.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사랑. 그 무한한 사랑 앞에, 오늘도 요양원의 창가에 앉아 아들을 기다리는 한 노인의 모습이 가슴을 찢는다.

오늘밤 꿈속에서라도 김정순 할머니가 손주와 아들과 한 상에서 맛있는 저녁을 드시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할머니의 방을 나섰다. 하지만 복도에서 들려오는 작은 흐느낌 소리가 내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잊지 말아야 할 진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부모님은 오늘 하루 어떻게 지내셨는가?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대화한 것이 언제인가?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고, 함께 식사를 한 것은 언제였는가?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 바쁘다. 일, 인간관계, 자신의 가족... 그 모든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무엇도 당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해준 부모님보다 중요할 수 있을까?

김정순 할머니의 아들은 자신이 바쁘다는 이유로 4년간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그는 요양비를 꼬박꼬박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94세 노모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아들의 얼굴이었다. 한 번의 포옹, 짧은 대화, 그것만으로도 할머니는 행복했을 것이다.

부모님은 우리의 첫 번째 선생님이자, 첫 번째 친구이며, 첫 번째 사랑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전부를 주었지만, 결코 돌려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는 것이다.

요양원에서 일하며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홀로 떠나는 노인들을 지켜볼 때다. 자식들이 도착하기 전에, 혹은 자식들이 오지 않은 채로 세상을 떠나는 노인들. 그들의 마지막 눈빛에는 언제나 그리움이 담겨 있다.

이 글을 읽고 지금 당장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보라.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변명으로 미뤄두었던 그 통화를. 가능하다면 직접 찾아가 얼굴을 보고, 손을 잡고, 따뜻한 식사 한 끼를 함께 하라. 소중한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전화를 걸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당신은 미처 하지 못한 말들, 나누지 못한 시간들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후회가 찾아오기 전에, 지금 이 순간 행동하라.

김정순 할머니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에게 경종이 되기를 바란다. 어제가 손주의 돌이었다는 할머니의 환상 속 행복이 아닌, 현실에서의 진짜 행복을 모든 노인들이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머니 마음/양주동 시, 이홍렬 작곡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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