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지였다

사진출처: MBC 베스트극장 '형님이 돌아왔다'

by 트윙클

며칠 전 충격적인 기사를 봤다. 초등학생들이 교실에서 친구의 부모님을 상대로 하는 은어를 남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느금마 김치찌개 장인(맥락 없이 친구의 부모님을 언급하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표현)'이 있다. 또는 친구 부모님의 성함을 친구 부르듯이 한다는 것이다.


뭐, 이건 사실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이 전에 '월거지(월세 거주자를 거지에 빗대어 비하하는 표현)'와 '전거지(전세 거주자를 거지에 빗대어하는 표현)' 그리고 '200충(부모 소득이 월 200만 원)'과 '300충(부모 소득이 월 300만 원)'을 먼저 접해서 그런가 보다.


사진출처: 엠빅뉴스


나는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지만 그렇다고 풍족한 곳에서 태어났다고는 절대 볼 수 없다. 굳이 한쪽에 가깝다면 '경제적으로는' 조금 부족한 집에 가깝다. 모님이 성실한 분이셨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성장할수록 집의 위치도 조금 더 편리한 곳으로 옮기게 되었고 새집으로 이사하게 되었으며 내 방의 크기도 조금씩 커졌다.


태어나서 유치원생 때까지만 해도, 2층짜리 주택에서 2층에 거주하며 전세를 내는 곳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부모님 회사가 소유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고학년 때는, 드디어(?) 부모님 명의의 새 아파트에서 살게 됐다.


이렇게 고학년 때 이사를 하면서 전학도 하게 됐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생일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생일파티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는 인기가 많은 덕에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다음 날, 파티에 참석했던 한 친구가 물었다.


'너네 집 몇 평이야?'
'25평이면 너무 좁지 않아?'
'가난해?'


나는 평수에 대한 개념도 부족했고, 친구 집을 놀러 가도 '넓다'라는 느낌에서 그만이었다. 지역에서 비교적 잘 사는 동네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 집보다 더 좁은 집에 사는 친구를 보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가장 최고의 생일이 될 줄 알았던 생일이 가장 최악의 생일이 되어버렸다.


'이번에 결혼하는 누구는 어디에 산다던데
그곳에 새 아파트도 없을 텐데'
'같이 퇴근하면서 누구를 태워줬는데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에 살더라'
'누구는 폭스바겐 타고 다니더라'
'누구는 옛날 아반떼 타고 다니더라'


하(탄식에 가까운 한숨). 20대 중후반이 되어서도 이런 사람을 접할 줄 누가 알았으랴. 그것도 직장에서. 이 말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나는, 싼타페 2000년대 초반식을 15년간 애지중지 타고 계신 부모님과 가끔 함께 퇴근을 하게 되면 회사 근처에 정차하지 말고 회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정차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 이상한 동료 입에 오르내리기 싫거니와, 그 동료의 이상한 가치관을 바꿀 용기는 더더욱 없었기에. 나에게 부모님 직업이 무엇인지까지 물어봐주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


사진출처: 영화 '친구'


이상한 사람을 접하면서 얻게 된 것도 있다. 아파트 브랜드와 자동차 브랜드를 통달하게 됐다. 소소한 취미도 생겼다. 길을 가다 어떤 자동차를 보게 되면 로고를 맞추면서 스스로 뿌듯해한다.


우리 가족은 2년 전, 15년 동안 살았던 그리고 집이 가난하냐고 물었던 그 새(?) 아파트에서 평수가 조금 더 넓은 다른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최근에는 부모님과 15년을 함께했던 그리고 부모님의 가장 소중한 자식이었던 싼타페와도 영원히 이별 폐차하고 제네시스를 맞이했다. 이제 부모님이 직장에 데리러 오시면 회사 근처 눈에 잘 띄는 곳에 정차하라고 말씀드린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냐고?


이상한 사람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소유하고 있는 물건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 보고 싶은 장면도 있다. 바로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이상한 사람이 내게 아파트 브랜드와 자동차 브랜드에 대한 지식을 얻게 해 주고 소소한 취미를 얻게 해 준 보답이라고나 할까.


안타깝게도 이건 나의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는 단편적인 해결 방법이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본질적인 해결방안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정상적이지 않은 가치관을 심어준 요인은 집에서 하는 부모들의 대화가 크지 않았을까.


정상적이지 않은 부모들의 대화를 통제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부모들과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엔 없는 것인가. 이로 인해 상처를 받는 다른 아이들의 아픔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등학생 때로 다시 돌아가게 되더라도 이상한 친구의 이상한 부모의 대화를 통제하지 못한다. 불가능하다. 다만 한마디는 할 수 있겠다.


너는 생각이 25평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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