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뼈다귀 같은 명절 문화
명절 D-day 7일 전. 돌아버리겠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오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남편이 꼴도 보기 싫다. 남편도 세한 느낌이 다가오는지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명절이 시작되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은 확연히 갈린다. 아버님과 아버님의 형제들, 어린 10대 자식들까지 남자란 남자들은 모조리 티브이 앞 바닥과 일심동체가 되어선 애벌레처럼 방바닥을 기어 다닌다. 여자들은 분주히 제사상의 음식들을 끝없이 만들어댄다. 냄새만 맡아도 질리는듯한 제사 음식들이 다 만들어지면 남자들은 갑자기 엄숙하게 일어나 제사상 앞으로 다가와 절을 한다. 남자들의 절이 끝나면 부엌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들은 그제야 몇 번의 절을 올리고 그렇게 공식적인 명절 행사는 오 분여 만에 마무리된다. 식사가 시작된다. 시어머님의 밥그릇은 아직 밥상 위에 올라가지도 않았건만 시아버님의 식사 시작과 동시에 새파랗게 어린 10대 조카 놈까지 먼저 앉아 밥을 먹기 시작하더니 자기가 먹은 밥그릇 하나 치우지 않고 핸드폰을 들고 사라진다. 동서의 어린 초등학생 딸은 엄마를 도와서 남자 밥상의 시중을 든다. 밥상을 치우는 어린 초등학생 딸을 보고 남자들이 얘기한다.
“어린 게 기특하네. 동서가 교육을 참 잘 시켰어”
씨알. 이게 웬 개뼈다귀 같은 일인가?
명절 때마다, 제사 때마다 시댁에서 겪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의문점들이 점점 더 생겨났다. 나는 엄마를 따라 밥상을 치우던 어린 초등학생 조카에게서 아직 어린 내 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내 딸이 자라서 명절 때마다 나를 따라 밥상을 치우며 교육을 잘 받았다고 칭찬을 받을 장면이 떠오르자 미친 듯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나의 딸은 그 개 뼈다귀 같은 문화를 당연한 모습으로 익히며 자랄 것이고 동서의 초등학생 딸처럼 곧 엄마를 도와 남자 밥상을 치우기 시작할 것이다. 끔찍했다.
나는 내 남편의 아내이기 이전에 여자이고 독립체며 딸을 가진 엄마다. 내 딸에게 세상에 너의 자존감만큼 중요한 건 어디에도 없다고, 네가 너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타인도 너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것이라고 아이한테 언제나 얘기해 줬다. 그런데 정작 뿌리부터 잘못된 명절 행사에 관해서는 지금껏 ‘어쩔 수 없다’라는 남편의 저 한마디 때문에 내가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처럼 받아들이고 살고 있다. 명절 때마다 엄마가 내뱉는 말과는 다른 모순된 삶을 사는 모습을 더 이상 내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난 구정을 앞둔 어느 날 앞으로 명절 행사엔 일체 가지 않겠다고 남편에게 선언했다. 남편은 당황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어머님 아버님이 더 이상 제사상을 못 올리실 때가 오면 명절 행사를 본인이 없애겠다고 나를 설득했지만 나는 단호했다. 그때가 5년 후인지 10년 후인지 알 수 없었고 그때만을 기다리면 결국 맏며느리 순리대로 제사를 물려받게 될 것이 뻔했다. 남편과 대립하고 싶지 않아서, 집안의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계속 참아내기엔 그럴 이유가 나에겐 전혀 없었다.
우린 싸웠고 또 싸웠고 결국 합의했다.
“엄마 아빠는 이 제사상을 죽어도 포기 못한다고 하시고, 포비는 제사상을 죽어도 못하겠다고 하니 나는 선택을 해야 해. 나는 포비와 결혼을 했고 당신은 내 와이프고 내 아이의 엄마야. 나는 우리 가족이 소중해. 내가 엄마 아빠를 설득할게. 우리 앞으로 명절엔 가지 말자”
남편의 대답이었다. 고마웠다. 진심으로.
남편도 힘들 것이다. 시부모님이 평생을 해오신 제사상 차리기를 본인 선에서 끊어야 한다는 입장이 얼마나 곤란할지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매해 우리는 명절 때마다 시댁 문제로 싸움을 해왔다. 그 싸움은 매해 해가 갈수록 심해졌고 갈등은 깊어졌다. 아마도 계속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끌고 간다면 그 갈등이 우리를 곧 잡아먹게 될 것이란 걸 남편도 느꼈을 것이다. 남편은 현명한 사람이다. 그는 가족을 위해 가장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다. 우린 명절 행사를 안 한 지 이제 4년이 넘어간다. 나는 어머님께 죄송한 마음은 있지만 말 그대로 그냥 그건 죄송한 마음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시어머님이 안타깝지만 그건 시어머님이 선택하신 삶이시기에 안타까운 마음 말고는 더 이상 내가 해드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명절에는 참석하지 않지만 그 전후로 찾아뵈며 따로 인사를 드리는 방식을 택하고 지금껏 그렇게 해오고 있다.
일 년 전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시아버님의 제사상은 한적했고 초라했다. 평생 동안을 명절 때마다 친인척들을 불러 조상님 제사상을 올리고 사셨던 아버님은 막상 본인이 돌아가시고 나자 아버님의 상을 올려주는 건 우리가 낸 돈으로 올리는 납골당 제사상뿐이었다. 아버님 기일날, 남편 말고는 아버님 형제분이나 친인척분들은 단 한 분도 오시지 않았다. 아버님이 과연 그 납골당 제사상에 오셔서 제사 음식을 드셨을지, 드시러 오셨다고 하더래도 그 한적한 제사상에 마음이 어떠셨을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난 얼마 전 남편에게 말했다.
다른 건 하지 않아도 시아버님 제사는 우리가 지내자고.
돌아가신 아버님의 혼령이 있다고 믿어서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물론 아니지만 아버님이 돌아가신 기일날은 아버님을 추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었다. 남편에게도 아버님을 추억할 시간을 주고 싶고, 내 아이에게도 엄마 아빠가 부모님을 추억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날이 내가 원하는 명절이다. 얼굴도 보지 못한 시댁 조상님들이나 이 씨 가문의 남자들이 아닌 내 남편을 올바른 인성으로 키워주신 아버님께 감사하고 추억하고 애도하는 마음으로 명절 제사상을 올려드리고 싶다.
나의 부모님도 남편의 부모님도 모두 소중하다.
우리는 부모님께 잘 자라났으며, 독립을 했고, 가정을 꾸렸고, 한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부모님의 삶의 방식이 우리 가족에게 대물려와 힘들게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과감히 포기하거나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아들, 효자 아들, 착한 며느리는 이제 그만 내려놓고 좋은 남편, 좋은 아빠, 현명한 엄마가 되어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결국 부모님께 진정으로 바라는 모습이 아닐까. 진정한 효란 허례허식이 아닌 마음으로 돌아가신 분을 그리워하고 그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게 진짜 명절의 참된 의미이자 바른 효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아이의 명절은 일 년에 몇 번 보지도 않는 남자 친척들의 밥상을 치워야 하는 날이 아닌, 가족이 함께 돌아가신 아버님을 추억하며 감사를 표하는 웃음이 깃든 명절을 보내게 될 것이다.
올 추석, 아버님의 너그러운 미소가 유난히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