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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bi미경 Feb 01. 2024

아빠의 대장암 4기 소식

난 몹쓸 년이다


슬프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혹시나 하며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최근 들어 배를 자주 아파했다. 본인 건강에 워낙 예민했던 사람인지라 때마다 건강검진을 빼놓지 않았었고 한약도 매번 (혼자) 지어먹었고 영양제는 하루에 몇십 알을 먹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불과 3개월 전에도 대장내시경과 피검사를 해봤고 모든 게 깨끗하다고 나왔던지라 아빠는 단순히 좀 심한 장염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 난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난 혼자 배통증으로 검색을 해봤고 대장이 깨끗하다면 췌장 쪽이 안 좋은 경우가 종종 있다는 내용을 본 뒤론 어쩌면 혼자 확신하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진단도 받기 전부터 아빠의 암을 먼저 예상하고 그걸 이미 확신하고 있는 내 모습은 천하에 몹쓸 년이 따로 없을 행동이지만 난 그냥 아빠가 암일 것 같았다. 설마 암 이길 바랬던 건 아니었나고 누가 묻는다면 노코멘트라고 답하고 싶은데 어찌 됐든 저찌됐든 난 몹쓸 년이다.     


검사결과 아빠는 대장암이었다. 그것도 말기. 3개월 전에 했던 대장내시경에 아무것도 안나온건 아빠의 대장암은 찾기가 아주 힘든 소장에 근접해 있는 부위였다고 한다. 대장과 소장사이에 생긴 암덩어리는 아무도 모르게 말기가 될 때까지 자라고 있었다. 마치 내가 아빠를 미워하고 싫어했던 모든 감정이 아빠 속에서 암덩어리가 되어 자리 잡힌 것 같았다. 죄책감도 측은함도 서글픔도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삶의 결말은 누구나에게 정해져 있는 것 같았고 아빠의 결말이 암이란 사실은 몹쓸 년인 내 기준에서 오히려 어울린다고까지 느껴졌다. 예상은 했지만 무덤덤해도 너무 무덤덤한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좀 너무했다. 

    

아빠는 좋은 가장이 아니었다. 폭력, 폭언, 허세, 바람으로 가득 찬 나쁜 남편이자 나쁜 아빠였다. 엄마는 아빠와 살면서 안 해본 일이 없이 살아왔다. 빌딩청소, 목욕탕 때밀이, 식당 허드렛일, 모텔청소까지 사업하느라 돈만 가져다 쓰는 아빠와 살면서 언니와 나를 먹여 살리려고 평생을 일해왔다. 아빠는 언제나 새 양복을 빼입고 다녔지만 엄마는 겉옷은 물론이고 오래 입어서 구멍 난 속옷을 몇 년씩 입으셨다. 언니와 내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 천운인지 아빠 사업이 잘 풀려 엄마의 고생은 끝날 수 있었지만 엄만 젊을 때 했던 고된 일들로 인해 지금도 무릎을 절고 계신다. 아빠와는 뭐 하나라도 엮이기 싫었다. 일찌감치 독립을 했고 아빠와 정반대인 남자와 결혼을 해서 내 어린 시절과는 정반대인 온기 있는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아빠의 대장암 소식에 나만큼 무덤덤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내 언니였다. 측은해하거나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금세 나을 것이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 금세 나을 것이란 언니의 얘기는 절대 긍정적인 얘기가 아니다. 말기라고 난리 치다가 결국 주변사람들 다 고생시키고 혼자 멀쩡히 나을 것이란 의미가 함축돼있는 말이었다. 내가 커온 가정환경이 거지 같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빠의 암소식에 반응하는 언니와 나를 보니 우리 집이 진정 콩가루 집안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언니를 탓할 순 없다. 첫째라는 이유로 나보다 몇 배는 심한 모든 아빠의 폭력을 다 받아내며 살았어야 했기에 이 모든 건 아빠가 살아온 삶이 만들어낸 결론이다.     


엄마에게 얼마 전 전화가 왔다. 평생 희생적인 삶을 살아온 엄마는 아빠의 암투병에 그저 아빠가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며 삼시 세 끼를 정성으로 해먹이고 있다. 


“경아, 동네에 점 잘 보는 이모가 있는데 갑자기 그 이모가 엄마를 보더니 한마디를 하는 거야”

“뭐래는데? 점 본 거야?”

“아니, 점은 무슨. 괜히 이상한 얘기 할까 봐 듣기 싫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그 이모가 아빠가 아픈 게 엄마를 대신해서 아픈 거라고 하더라고. 엄마 올해가 나가는 삼재인데 그 삼재를 아빠가 대신 받고 있는 거래.”

“헐”

“그 이모 말이 길어야 3년이래. 엄마는 과부로 몇 년 살 팔자래. 아빠가 엄마대신 아픈 거니까 가기 전까진 잘해주라고 하더라.”     


이 통화 이후로 아빠의 암소식에 대한 내 태도는 달라졌다. 평생 엄마 힘들게 하며 살더니 마지막엔 그래도 큰 도움 하나는 주는구나 싶었고 아빠한테 갑자기 고마움이 살포시 올라왔다.

맞다. 난 몹쓸 년이다. 그래도 솔직한 년이다. 거짓으로 슬퍼하거나 걱정하진 못하지만 아빠가 고마울 땐 고마워할 줄 안다. 이후론 아빠에게 매일 전화를 한다. 치료는 잘 받고 있냐고 어디 아프진 않냐며 진심을 다해 묻는다. 아빠의 마지막 역할이 엄마 대신 아픈 것이라면 난 충분히 인정하고 잘해드릴 수 있다. 이런 부모도 있고 이런 자식도 있다. 아빠가 암에 걸렸다고 해서 그동안의 모든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눈물의 화해를 하는 관계도 있겠지만 난 그런 연기는 할 수 없었고 대신 지금 다른 이유로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매일 안부를 묻는 나에게 아빠는 진심으로 고마워하신다. 아빠도 진심이고 나 역시 진심이다. 결론은 우리 모두 다 좋아졌다.     

아빠가 암에서 완쾌가 되실지 정말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실지 알 순 없다. 그저 너무 아프지 않기를 너무 힘든 과정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싶다. 엄마를 위해서도 아빠를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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