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지랖이 없는 편이다. 30대까지는 어느 정도 오지랖 있는 삶을 살았던 것 같은데 결혼 후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주변인들도 가족단위가 되면서 점차 오지랖이란 게 사라져 갔다. 방황하는 청춘들이라면 이런저런 조언과 충고도 오가면서 서로에게 오지랖이란 걸 부리며 관계를 이어간다 쳐도 나이가 좀 들고 가족이 생기면서부터는 서로를 지켜주는 가족들이 곁에 있게 되면서 필요이상의 관심과 조언은 오히려 관계에 해가 되는 듯싶어 서서히 타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요즘 수영을 다니면서 잠들어 있던 내 오지랖이 자꾸 깨어 나오려 한다. 서로가 아주 내추럴한 모습을 한 채 한 무리의 모둠이 되어 수영이라는 같은 운동을 배우다 보니 같은 타임에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는 이제 어느 정도의 끈끈한 관계형성이 되어간다. 나 역시 처음 1-2개월은 낯가림도 있고 수영이 도통 늘지를 않아 주변인들과 눈인사도 잘 나누지 않았지만 어느새 5개월 차가 되면서부터 같은 모듬의 사람들과는 남녀 크게 가리지 않고 인사를 나누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보통 대화의 주제는 이 자세가 되느냐 안되느냐 너는 되는데 왜 나는 그게 안 되느냐 그나저나 오늘은 유독 힘들지 않으냐 등등인데 쾌활한 언니들과는 달리 남자분들 대부분은 멋쩍어하시거나 과묵하신 분들이 많은 편이다. 얼마 전엔 앞자리를 항상 지켜주셨던 언니분들 4-5명이 중급으로 승격이 되면서 어쩌다 보니 내가 앞에서 두 번째를 차지하게 되었는데(수영은 실력별로 줄을 선다 으하하하) 앞에서 이끌어주시던 언니들이 없어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그 언니들로 빙의가 되어선 옆사람에게 오지랖 있게 말을 걸고 있다.
“평형 뒷발차기 좀 돼요? 전 왜 이리 안나가쥬?”
“포비언니, 저도 그래요~ 자꾸 헛발질만 하게 되고 남자분들은 어찌 그리 잘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남자들은 잘한다고? 그럼 남자들한테 물어봐야겠네? 슬그머니 내 뒤에 서있던 남자분에게 시선이 간다.
“좀... 돼요?”
“네? 쿨럭~ 으음. 저.. 저는 조금은 됩니다. 후훗”
“우아 좋으시겠어요! 비결 좀 알려주세요!”
“후훗. 발바닥을 안쪽으로 모으시고요~ 그때 힘을 확! 주면서 물을 잡아 모으세요!!”
“오오오!!”
나이구분, 남녀구분, 연차구분, 직급구분이라곤 없는 수영장은 그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최고봉이다. 부러움의 시선이 쏟아지고 내 비루한 몸동작과 저 사람과의 다른 점은 무엇인지 관찰하고 물어보느라 정신이 없다. 처음 수영을 시작했을 때에는 강습선생님에게만 질문을 하곤 했는데 막상 해보니 원래부터 잘하는 선생님과는 달리 나처럼 태생이 물과 친하지 않은 어린 수린이들끼리 수영비법을 의논을 하면 안 되던 동작도 해결이 되곤 했다.
회원들 중 굉장히 묵묵하고 성실하게 수영을 하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회원분이 한분 계시는데 그분의 별명은 '안타까운 배영'이다.(나혼자 지은 별명으로 남편에게 얘기할 때 쓴다) 안타까운 배영님은 정말 안타깝다. 정말 열심히 누운 채 배영을 하시는데 머리는 물속으로 잠긴 채 팔과 몸통만 띄워 휘적거리시느라 수영장에 있는 물은 다 마시면서 전진하신다. 얼마 전엔 물을 얼마나 드셨던지 배영을 끝낸 후 남몰래 등을 돌려 혼자 헛구역질을 하고 계신 것도 목격했다. 오지랖이란 없는 나란 여자 안타까운 배영님을 보면서 수없이 고민을 했다. 머리통을 좀 들어야 한다고. 턱을 좀 내려야 한다고. 그래야 네가 살 수 있다고! 말해드리고 싶은 욕구가 그분을 볼 때마다 마구 끓어 올라왔다. 남일인데 내 수영이나 잘하지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있나 싶다가도 이상하게도 수영장에선 내가 겪었던 괴로움을 똑같이 겪는 분들을 보면 한마디라도 도와드리고 싶어 진다. 아마도 얼마 전 중급으로 승격되신 언니들의 친절한 가르침 덕분에 수영의 많은 팁을 얻게 되면서 내리사랑이라고 내가 받은 사랑 너희들에게도 나눠드리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결국 난 며칠 전 배영을 끝내고 힘겨워하고 계신 안타까운 배영님에게 다가갔다.
“저.. 기요.”
“네??”
“배영하실 때.. 턱을 땅기면 얼굴이 좀 뜨거든요. 저도 처음엔 물 많이 먹었는데 그렇게 한 다음부터는 배영이 훨씬 쉬워졌어요. 매번 물을 좀 많이 드시는 것 같아서...”
“아~아..! 그렇군요! 안 그래도 자세를 좀 고쳐야 한다고 선생님께 듣긴 했는데 그게 쉽게 안 됐는데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헤헤. 저도 다른 언니분께 받았던 팁이에요. 한번 적용해 보셔요”
안타까운 배영님은 거듭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다시 한번 비장하게 배영자세를 취한 뒤 출발하셨다. 어이쿠 우리 배영님 여전히 물 위로 머리통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도 아주 미세하게 가끔씩 얼굴이 물 위로 나오는 타이밍이 생기신 듯했고 배영을 마친 우리 배영님께선 밝은 웃음을 지으신 채 내게 말씀하셨다.
“오~ 턱을 당기니까 물을 훨씬 덜 먹었어요! 하하핫 좋은 팁 감사합니다.”
우리 안타까운 배영님께선 그 후로도 수없이 물을 드시긴 하는 듯싶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는 게 느껴졌고 우린 그렇게 또 한 번 무언의 단합심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렸을 땐 공부든 뭐든 나만 잘하는 게 중요했던 것 같은데 삶을 살아오다 보니 내가 겪거나 힘들어했던 일들로 누군가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일 때면 나도 그랬다고, 그러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내가 건넬 수 있는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진다. 아마도 이런 게 나이 들면서 생기는 오지랖이 아닐까. 내일에 신경 쓰지 말라며 방어적인 자세로 살았을 때는 오지랖을 부리는 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건만 이젠 그게 나의 엄마든, 옆집할머니든 나를 위해 건네는 한 마디씩의 오지랖의 말들이 살아갈수록 감사하게 느껴진다.
내일은 평영 발차기 최고봉에게 다가가볼 것이다. 그분도 지금의 나처럼 허우적거리던 시간이 있었을 테니 내게 그만의 비법을 아주 친절히 알려줄 것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다. 도움 받고 도움 주는 딱 그 정도의 오지랖이라면 팍팍한 삶을 조금은 더 부드럽게 해 줄 수 있는 윤활유가 되어주리라. 수영의 자세만큼 삶의 자세 또한 조금씩 나아져 간다. 그렇게 매일 앞으로 흘러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