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불치병
"숙제 해야지.” “목욕 해야지.” “밥 먹어야지.” “잠 자야지.”
같이 있는 시간도 많지 않은데 만나면 무엇인가 계속 확인하고 있는 내 모습이다.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봐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그런지 항상 마음이 다급하다. 딸 아이는 잔소리하고 화 내는 것을 엄청 싫어하는데 입만 열면 잔소리이다.
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작년 한 해 아이에게 신경이 많이 쓰였다. 요즘은 1학년 입학 전 한글은 완벽하게 떼고 온다는데, 딸은 그렇지 않았다. 한글 떼라고 책을 읽어 준 건 아니지만 책을 많이 읽어주면 스스로 한글을 깨우친다 하던데 아직 까막눈이다. 남들 다 한다는 학습지도 시켜 보려 했지만 의견 강하고 고집 센 아이의 거부로 그것도 포기한 상태였다.
1학년 때 학습 습관을 잡아줘야 한다, 그때 못하면 자신감을 잃는다 등 나를 불안하게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더 걱정스러웠던 것 같다. 받아쓰기도 할 텐데 저 실력으로 어떻게 시험을 보나 싶었다. 드디어 입학 후, 받아쓰기 과제가 주어졌는데, 사전에 정해진 문장 열 개를 암기해 가서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매일 한 번씩 쓰고, 주말에는 같이 테스트를 하자고 했다. 당연히 아이 혼자서는 공부를 하지 않았고, 대신 주말에 테스트 점수가 100점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시험을 봤다. 처음에는 30점, 틀린 것을 혼자 써보고 다시 시험 보기를 수 차례, 드디어 100점이다. 이렇게 주말마다 우리는 전쟁 아닌 전쟁을 했다. 그래서 두 번인가 빼고 영광의 100점을 받아왔다.
작년에는 딸 아이의 생애 첫 피아노 대회가 열렸다. 대회를 앞두고 있는데 피아노 실력이 엉망이라 그대로 나가도 되는지 의문스러웠다. 딸 아이를 붙잡고 계속 연습을 시켰다. 한 마디라도 제대로 칠 때까지 하는 거라며, 잘하고 싶지도 않은 아이를 애써 붙잡고 있었다. 아이는 나의 다그침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원래 어려울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며 우는 아이를 외면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아직 어린 아이를 참깨 볶듯이 참 들들 볶았다.
그러다 올해 들어 내 집 마련해보겠다며 공부하러 다니고, 다른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아이에게 잔소리할 시간이 확 줄어들었다. 숙제도 제대로 안 봐주고 내가 이래도 되나 싶게 바쁘게 일상이 돌아가고 있다. 딸 아이도 코로나로 집에서 방학 같은 몇 달을 보내고 드디어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못 했던 받아쓰기도 하는 눈치다. 1학년 때와 달리 챙겨주지도 못해서 30점 받아오는 거 아닌가 하고 내심 걱정을 했는데, 내 기우와 달리 100점을 받아왔다. 내가 그렇게 안달복달 안 해도 때가 되니 한글을 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생각해보면 잘하고 있는 게 너무 많았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딸 아이는 어른들이 요리할 때 꼭 거든다. 서툰 솜씨지만 꼭 자기가 해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하다 보니 계란도 깰 수 있고, 커피도 내릴 수 있다. 지난 주말에는 할머니를 거들어 김장도 담았다고 한다. 나도 안 해 본 김장을 하는 너라는 아이는 대체 뭐니? 김치를 담는 할머니 곁에서 자기가 꼭 하겠다고, 할머니 혼자 하면 안 된다고 좋아하는 TV도 안 보고 대기하고 있는 아이 모습이 신기하고 귀엽다. 온 몸에 김장 양념이 묻었지만 그래도 즐겁다.
올해 초 딸이 “우리 부모님을 소개합니다”라는 주제로 쓴 일기를 우연히 봤는데 딸 아이 눈에 비친 내가 진짜 잔소리꾼인가 보다.
“엄마는 항상 매일 매일 잔소리를 합니다. 그리고 엄마는 항상 화를 무지무지 많이 냅니다.”
남편과 딸에게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잔소리를 제일 잘 한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 잔소리 안 할께’ 라는 말도 잘 하는데 절대 못 믿겠다고 한다. 잔소리가 나에게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과 같다. 아이 뿐 아니라 남편, 심지어 친정 부모님께도 입만 열면 잔소리를 하는게 나였다. 뭐가 그렇게 쓸데없이 자질구레하게 할 말이 많았던가?
바이런케이티의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에는 아이에게 자신의 삶을 돌려주는 법이 나온다.
”아이에게 그 아이 자신의 삶을 돌려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 아이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안다고 여기는 순간, 고통스러운 일들이 닥쳐옵니다. 그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희망은 없습니다.”
잔소리를 한다는 건 나만의 기준을 갖고 거기에 상대방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별개의 인격체에게 나와 같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우습기도 하고, 사실 잔소리를 해도 상대방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만히 지켜봐 주고 칭찬을 통해 긍정적인 면을 더 키워주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딸 아이에게 잔소리보다는 칭찬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잘한 것을 찾아서 칭찬을 하니 딸 아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나의 불치병도 이제 치료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