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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ul 24. 2024

엄마를 돌보다

잠깐인데도 나는 지금 너무  

피가 끈적끈적해진 것 같아. 이 피는 너무 탁하고 무겁고 답답해. 쓰러질 듯 침대에 누웠다. 꿈인지 생시인지 텅 빈 머릿속에 뜬금없이 피가 그려졌다. 고인 강물처럼 느릿느릿 흐르고 있는 그 피는 내 것이었던가 그냥 내 자체였던가.



친정엄마의 병원생활 12일 차. 나의 병간호 생활 8일 차. 나는 벌써 지쳐버렸다. 생사를 가르는 절박한 상황도, 병원생활이라 불릴 만큼의 긴 기간도 아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몇 번의 단기 입원실 보호자의 경험을 통해 나는 알고 있다. 병원 생활에는 장사가 없고, 겨우 입원 첫날, 나는 환자의 보호자이지만 컨디션은 환자 만만치 않은 환자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처음에는 친정 엄마 걱정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찼다. 가타부타 다 치워놓고 일단 가여웠다. 부러진 허리가 얼마나 아플까. 잘 나아야 할 텐데. 후유증은 없을까. 걱정에 걱정이 얹혔다. 얼마나 자책하고 있을까. 외로울까. 이 정도로도 다행이다. 감사한 마음과, 이렇게도 엄마와 시간을 보내게 되는구나, 애틋한 마음까지, 긍정의 기운이 소록소록. 러나 단 며칠 새 부정적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엄마가 미워졌다. 골다공증 환자가 소금 다섯 포대를 끌다니. 그 지경까지 왜 자기 관리를 안 하나. 자식을 생각해서도 그러면 안 되지 않나. 부정적 감정이 쌓이면 무기력해지는 나와 달리 감정을 겉으로 폭발시키는 엄마의 모습은 병원에서도 종종 나타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싫어졌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두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아니나 다를까 집안은 개판이고 고등학생 큰 아들은 그 와중에 반찬 타령. 가족의 돈독함이 시험받는 이런 상황이 나는 매번 두렵다.



동네 독서 모임의 이번달 발제자는 나였고, 함께 읽을 책으로 내가 소개한 책은 공교롭게도 <어머니를 돌보다>였다. 린 틸먼은 11년간의 어머니의 병간호 생활에 대해 작가 특유의 날카롭고 섬세한 감각으로 기록을 이어 나갔다. 책을 읽자마자 내 엄마의 병간호 생활이 시작되었고, 책 내용을 알았다고 엄마의 돌봄 상황에 대한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벌어지는 상황에 크게 놀라지는 않게 되었다.



나는 좋은 딸 역할을 연기했지만
거기에는 내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고
대신 내 양심은 담겨 있었다.
(130쪽)



척추가 부러져 구급차에 실려 온 동네 종합병원에서는 엄마에게 14일간 움직이지 않고 무조건 누워있어야 된다고 했다. 14일 후 부러진 뼈에 시멘트를 바르듯이 뼈를 이어 붙이는 시멘트 시술을 하겠다고 했다. 화장실도 걸어가면 안 된다며 기저귀를 채우고 변을 보라 했지만 엄마는 정신 온전한 사람이 어떻게 기저귀에 변을 볼 수 있냐며 9일을 버티다가 9일째에 가까스로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 일을 보았다. 입원 11일 차, 의료 대란 속에 간신히 예약해 방문한 대학병원 교수는 '자기 보존적 치료'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했다. 즉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집에 가서 일상생활을 다 하고 지금 당장 그 휠체어에서 일어나 걸으라고 했다. 다친 척추도 척추지만 엄마는 11일간 누워 있으면서 몸에 근육이 빠지고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어 휠체어로 병원에 온 상태였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세 번째 병원 의사는 첫 번째 병원과 두 번째 병원 의사의 말을 모두 반박했다. 환자의 통증을 10일 넘게 방치하고 기저귀를 채운 첫 번째 병원에 대해 인권 유린을 언급했고, 일상생활을 하며 스스로 뼈를 붙게 하라는 대학병원 의사의 말에는 같은 사례로써 뼈가 붙기를 바라고 몇 달을 방치했다가 뼈가 완전히 주저앉은 다른 환자의 차트를 내밀었다. 우리는 의사라는 존재에 대한 절대 경외감과 불신이라는 양가감정, 우리의 무지함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무력감에 멍해졌고, 그 와중에 또 다른 선택지를 앞에 두고 혼란스러워졌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세 번째 병원에서 허리에 손톱만 한 보형물을 집어넣고 뼈를 고정시키는 시멘트술을 하기로 했다. Spine Jack이라 불리는 생소한 시술 방법은 국내에서는 검색 결과도 별로 없었다. 대체적으로 척추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이를 요목조목 반박한 어느 교수의 글이 우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그 또한 모험일 것이고, 오늘의 선택이 부디 최선의 선택이길 기도할 뿐이다.






작가 린 틸먼은 어머니의 병간호 중에도 글쓰기 시간을 사수했다. 그녀의 두 언니는 그녀가 책을 읽고 글을 써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했고 그렇게 그녀는 종종 예술가들을 위한 작업실에 자신의 위태로운 심신을 뉘었다. 반면 전문 작가도 아니고 나를 이해해 줄 형제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나는 엄마의 돌봄으로 내 일상의 최전방을 지키고 있던 독서와 글쓰기가 막혀 버리자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병원에서 틈틈이, 그리고 병원과 집을 오가는 버스에서 깨알같이 독서를 챙겨보려 했지만 피곤함으로 텍스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버스에서 대체로 나는 병든 닭처럼 졸거나 멍하게 창 밖을 응시했다.



닭이라도 고개를 쳐 넣을 곳이 필요해. 새벽 다섯 시. 미칠 듯한 피곤함과 가슴을 억누르는 답답함에 나는 책 한 권을 은장도처럼 가슴에 품고 집을 나왔다. 새로 산 책들, 여러 도서관과 주민센터에서 빌린 책들, 마저 읽어야 할 서너 권의 연체된 책들 말고 나는 오랜만에 책 <엄마 됨을 후회함>을 떠올렸다. 집 근처 24시간 무인카페에서 일전에 밑줄 그어놓은 문장들을 다시 읽으면서 눈두덩이가 뜨거워졌다.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막혔던 숨이 조금 쉬어졌다.



이번 달에 끝내려고 했던 아이슬란드 여행기는 무기한 미정이다. 아들에 대한 연재 기는 요즘 아들들이 잘 살고 있는지 아닌 건지 잘 모르고 있다가 오늘 어떤 엄마가 전화가 와서 컴플레인을 하여 아들 2호의 일상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이래저래 일상이 널브러져 있는 듯한 느낌 속에서도 좋아하는 작가 이반지하의 신간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기다리며, 애정하는 다다 서재 출판사에서 나온 책 <꽃을 위한 미래는 없다>의 센스 있는 작가 남편을 꿈꾼다. "Let me know before you go go 떠나가기 전에 나에게 알려 줄래"라고 팝송 노래를 인용해 부인의 머릿 맡에 메모지를 남기는 남편. 너 요즘 엄청 답답하지, 내가 알고 있어, 걱정하고 있어, 어디든 다녀와, 그때가 언젠지 나에게 알려만 줘. 캬아......




(우리는) 적극적으로 죽어가고 있다.
(229쪽)



오늘 나는 이 브런치 공간에 내 머리를 박았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한 시간 반이라는 단기 자유시간에 미친 듯 타이핑을 쳤다. 양가 부모님들은, 아니 실상 모든 인간은 이 순간 적극적으로 죽어가고 있다. 앞으로도 지지고 볶고 고달파하여 일상을 살아갈 테지만 그때마다 나는 또 내 머리를 쳐 박을 공간을 다급하게 찾을 것이고, 그리고 나서는 안도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그거면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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