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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Aug 19. 2024

8. 아이슬란드 도서관에서의 발표

“안녕하세요, 여러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시립도서관, 호기심 어린 얼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중석 맨 뒤에 서 있던 도서관 사서 릴랴와 눈이 마주쳤다. ‘잘하고 있어. 네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해.’ 그녀의 따뜻한 눈빛에 하얘지던 머리가 조금씩 맑아졌다.

 


한국 그림책에 대해 발표하는 날, 그렇게 발표하면 안 된다고 컴플레인을 받는 꿈에 놀라 잠에서 깼다. 거울을 보니 뭔가에 물린 건지 피곤해서인지 아랫입술이 심하게 부어 있다. 이전 숙소에 두고 온 건지 세면 가방이 없어졌다. 가방을 뒤지니 다행히 일회용 칫솔과 치약 등이 있어 대강 씻었다.



도서관 사서 릴랴가 숙소로 픽업을 하러 왔다. 도서관은 다운타운에서 차를 타고 15분 정도를 가야 한다. 차 안에서 릴랴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발표 생각으로 꽉 차 있다. 대화를 이어가려고 신경을 써보지만 곧 차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발표 망하면 어쩌죠?”

“망하면? 할 수 없지, 뭐! 준비한 선물 쫙 풀어놓고 와요. 그것만 해도 완전 인기일걸? 그럼 대성공이지 뭐! 아하하하!” 한국에서 이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함께 해온 그림책 모임 분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슬쩍 안도하는 마음이 든다. 한술 밥에 배부를 수 없다. 시도만으로도 기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잘해 내야 한다는 비장한 마음이 올라온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일 수 있다.



이 프로젝트에는 많은 이들의 사랑과 염원이 걸려있다. 그뿐일까. 희망, 꿈, 가능성. 애정, 정성... 수많은 단어가 떠오른다. 너무나도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이 준비 과정에서 못난 엄마로서의 나의 자아와 그저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자아가 자주 충돌했다. ‘내 까짓 게 뭐라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다고? 돌겠네.’ 나는 자주 뒷걸음질을 쳤고 그때마다 중얼거렸다. 이건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야. 그녀들의 영혼을 얹고 가는 거야. 나는 이번 프로젝트의 메신저일 뿐이야. 나는 두렵지 않아. 나는 두렵지 않아. 그림책 모임 분들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설레어 하고 지지해 준 친구들, 지인들, 동네 독서 모임과 글방 모임 분들, 책을 지원해 준 출판사들, 후원해 주신 분들…….



몇 명이나 행사에 참여할 수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 릴랴의 말이었다. 관련 포스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렀지만, 실제 참여 여부와 무관하게 ‘시간 되면 꼭 올게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이슬란드인들의 스타일이라나. 때마침 독감이 돌고, 1년에 3개월밖에 없는 백야의 여름철 휴가철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근처 다른 나라로 이미 많이 빠져나갔다고 릴랴는 귀띔했다.



행사 30분 전, 릴랴는 여유로웠다. 전시해야 할 50여 권의 책, 한지, 보자기, 한복, 캘리그래피 글씨 엽서와 부채, 독후 활동 자료들과 먹거리. 머리가 새하얘지고 입이 바싹바싹 탔다. 딱 봐도 제시간에 준비되긴 어려워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할 것 같은데. 전날 세 번이나 물어봤지만 릴랴는 30분이면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했다. 더 이상 재촉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서 등 도서관 직원들은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절대로 도와주지 않았다. 문화인가. 잠시 릴랴의 눈치를 보던 나는 행거를 끌어와 한복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고 손이 가는 대로 닥치는 대로 내 마음대로 했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 생각이 간절했다. 그들이 여기 있었더라면 말없이 군대처럼 움직여줬을 텐데. 아…!



어느덧 10시 30분. 아버지와 딸인 듯한 백인 두 명이 와서 우리의 어수선한 상황을 슬쩍슬쩍 쳐다봤다. 아직 멀었는데. 어서 오시라고 인사를 했다. 10시 45분. 내 등에서 흐르고 있는 땀을 감지했는지, 원래 그러려니 하는 민족인 건지, 혹은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들인지, 잠시 후 고함을 지르면서 자리를 뜨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기다리는 이들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당연히 준비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돌연 사람들 앞에 섰다. 릴랴는 맨 뒤에 서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래 네가 쭉 하면 돼,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저는 저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아이슬란드에 숨어들고 싶었어요. 여기에서는 ‘엄마로서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해줄 것 같았어요. 나를 안아줘서 고마워요, 아이슬란드. 이제 저도 여러분께 한국의 고운 책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어요. 들어 보실래요?”



그 시간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15여 개 타이틀의 책에 대해 소개하고, 그중 두 권을 낭독하고, 몇 가지 독후활동을 진행했다. 발표가 끝나자 허탈함이 밀려왔다.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을 많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쉽고 아쉬웠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래야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온라인 회의에서도 손이 바들바들 떨려 화면 밖으로 손을 숨겨야 했던 소심한 나는 이번에도 많이 부족했지만 그렇게까지 떨지는 않았다.




아이슬란드에 거주하는 한인은 30여 명 남짓. 행사에는 15여 분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한국 행사에 참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또 뵐 수 있을까요?” 현지 회사에서 근무 중인 가장을 따라 체류 중인 4인 가족. “어머니가 한국 분이세요. 저는 한국어를 잊었지만, 한국 거라면 항상 제 아이들에게 보여줘요. 고맙습니다.” 서툰 한국어로 말하던 한국계 하와이 여성. "오늘 이벤트, 너무 소중했어요. 제 이름을 한국어로 알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십 대 아들과 함께 참여한 엄마. “안녕하세요.” 파란 눈의 아가씨가 한국어로 인사하며 수줍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녀는 무려 한국의 설화에 대해 아이슬란드어로 책을 낸 저자였다. “알바니아가 고향인데 거기 친구들이 한국 드라마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나눠 주신 한국 엽서를 가져가서 친구들에게 보해 줄 거예요.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무뚝뚝해 보였던 아저씨가 보내 준 다정한 메일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책 ≪행복의 지도≫를 소개해 준 동네 책 모임,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해준 그림책 커뮤니티의 여인들, 포기하지 말라며 내 손을 잡아준 온라인 글방 분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믿고 후원해 주신 분들, 내가 걱정할 때마다 토닥여준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도서관 사서 릴랴. 그들은 모두 나의 러닝메이트였고, 나는 그들의 영혼의 일부를 싣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이제 여행할 준비 됐어?”

“물론이지!”



다음날, 나는 내 인생 최초의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관심과 정성으로 이룬 한국 그림책 소개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그리고 그들과의 새로운 꿈을 꿈꾸면서. 엄마로서 주저앉아 있던 자아가 조금씩 일어섰다.



그림책 ≪노를 든 신부≫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여성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모험을 찾아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주인공이 아이슬란드로 가는 거네요!” 책을 기증해 준 출판사 담당자의 다정한 말이 떠올랐다. 입가에 미소가 차 올랐다.


여행은 부자의 특권이 아니다.
여행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  네빌 고다드 ≪내가 원하는 곳에 나를 데려가라≫


Menningarhús Gerðubergi: 레이캬비크에 있는 시립 도서관. 아이슬란드에서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위한 공간이 아닌 지역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커뮤니티 센터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은퇴한 시니어들을 위한 맛있고 영양가 있는 점심 식사를 제공한다. (도서관 사서 릴랴의 말)



기존에 연재를 완료한 '엄마 혼자 버스 타고 아이슬란드'의 수정 버젼입니다.
다시 읽고, 기억을 되새기며 다듬고 있습니다.
회차에 따라 지난 연재와 내용이 동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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