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에 도착한 첫날, 저녁 여섯부터 죽은 듯이 잤다. 원래 불면증이 있는데도 6인실에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른 채 기절한 것이다. 새벽 세 시에 깼지만 혼자 바스락거릴 수가 없어서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가 이른 아침에 살금살금 나왔다. 여름 시즌 직전이라 백야현상으로 밤에도 해가 지지 않았다.
도시의 상가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발길이 가는 대로 움직여도 길을 잃을 리 없는 작은 도시. 구석구석이 안전하며, 아이슬란드어와 영어가 병행 표기되어 편리한 곳. 이른 아침, 낯선 나라의 빈 골목을 누비며 마음이 잔잔히 충만해졌다. ‘내가 진짜 여기에 왔구나’.
한눈에 봐도 꽤 역사가 있어 보이는 서점. 유리창 안을 기웃거리며 안쪽 풍경을 상상했다. 입구에 붙은 서점 오픈 시간을 확인하다가 한 문구에 사로잡혔다.
"서점이 어때야 하는지 감히 정의해 보겠습니다. 유머와 학식, 호기심을 가진 자에 의해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는 책 형태로 된 것은 무엇이든 낯설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서점은 겉으로 보기에 영원히 혼란스러운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는데, 항상 선반 공간보다 훨씬 많은 책이 있고, 늘 검토가 필요한 새로 구입한 책들이 쌓여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서점은 다양한 책들을 제공해야 하는데, 그것의 주된 기능이 작가들이 자신의 취향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구를 쓴 John Fowles에 대해 찾아보았다. 1960년대부터 활동해 온 영국 작가이다. 그 순간, 서점이 신비롭고 매력 넘치는 물성 있는 공간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인생의 목표는 당신의 심장 박동을 우주의 리듬과 일치시키고, 당신의 본성을 자연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이발소에서 이런 문구를 보다니!
또 다른 벽. 화살표와 함께 붙어 있는 음식점의 문구.
"당신에게는 몇 걸음 더일 뿐이지만, 당신의 미각에는 거대한 도약입니다."
한국어로는 조금 낯간지럽지만, 시적인 표현이 인상 깊었다. 아이슬란드는 세계 독서 인구 1위, 국민 당 작가 수가 가장 많은 나라, 그리고 스토리텔링을 사랑하는 나라이다.
이런 글귀들은 언제나 내 시선을 사로잡고, 나는 그 앞에서 쉬이 떠나지를 못한다. 때로는 그것을 붙여놓은 이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이러려고 아이슬란드에 왔나 보다. 이런 작고 빛나는 것들을 위해’. 맞다, 나는 그래서 왔다.
숙소에서 2분 거리의 동산에 올랐다. 중앙의 벤치에 앉아 내려다보니 다운타운 전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가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의 중심부. 평일 아침 8시가 넘었는데, 출근길의 바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차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가장 바쁜 시간이겠지? 아이슬란드의 국토 면적은 대한민국과 비슷하지만, 총인구는 38만 명으로 우리나라의 100분의 1도 안 된다. 우리나라 동작구 정도의 인구수이다.
문득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성평등을 위해 총파업을 벌였던 장소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알고 보니 이곳 근방이었다.
“여성이 멈추면, 세상이 바뀐다.”
“여성을 바꾸지 말고, 세상을 바꿔라.”
1975년 10월 24일, 금요일의 단체 월차. 그날 아이슬란드 여성들은 성별 임금 격차에 항의하며 투쟁을 벌였다. 가사 노동을 포함하여 모든 일을 손에서 놓았다. 여성의 90퍼센트가 참여한 이 일로 당시 사회 전체가 마비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는 우리나라와 아이슬란드의 성평등 차별 정도가 비슷했다. 그러나 그날 여성들의 행동에 아이슬란드는 온몸으로 반응했고, 1980년,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4선을 거치며 16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고, 5선에 도전하지 않기로 하며 역할을 마무리 지을 때 그녀의 지지도는 90퍼센트가 훌쩍 넘어 있었다. 그녀는 90세가 넘은 지금도 살아있는 전설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 성평등 1위 국가*. 이제는 남녀를 떠나 ‘모든 인간의 완전한 평등’을 위해 꾸준히 총파업을 벌이고 있는 여성들. 그들이 운집했던 바로 그 곳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소름이 끼쳤다. 그들의 함성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단호하고 담대한 기운이 공원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더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만히 벤치에 머물렀다.
엄마라는 역할에 한없이 부대끼고 쓰러지던 날들. 그런 모든 과정 후에도 여전히 숙련되지 못한 나 자신을 끊임없이 힐난하고 저주하고 스스로가 흉기가 되어 마구 찔러댔던 시간. 그러나 나는 엄마 됨에 그토록 매몰되었어야 했을까. 나는 엄마가 되었으므로 나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해야 했을까. 내 부족함은 과연 나만의 잘못이었을까.
나는 역할을 연기했지만
거기에는 내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고
대신 내 양심은 담겨 있었다.
≪어머니를 돌보다≫
언덕에서 내려와 남편과 카톡을 했다. 큰 아이는 또 학교에 결석했고, 작은 아이는 축구부에서 발목 인대를 다쳐 부목을 하고 신나게 TV를 보고 있다고 했다. 너무 똑같은 일상이잖아. 당연한 일이겠지만.
여기서도 나는 아이들 관련 일을 체크하고 학교와 소통 하고 있다. 남편도 하고 있지만 나도 간간히 챙길 수밖에 없다. 사실 이곳에서만큼은 아이들 관련 일은 남편에게 맡기고 싶었다. 그러나 철저하게 끊어내지 못했다고 아쉽거나 분한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나를 나만을 위해 쓰고 있는데, 나머지 몇 퍼센트를 아이들에게 쓰는 게 뭐 그리 대수랴. 마음이 한없이 관대해졌다.
이제 곧 다시 짐을 정리하고, 은행에 가고, 박물관을 돌아볼 것이다. 분주한 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겠다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머릿속이 폭주하는 열차처럼 미친 듯이 돌고 있지 않다는 것, 한 번에 하나만 하고 있다는 것, 그렇게 내 안에 틈이 생겼다는 인식이 나를 너무나도 평온하게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하늘이 금세 어두워지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척박한 지형과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로 유명한 아이슬란드. 이제 시작인 건가? 서둘러 고어텍스 점퍼의 후드를 눌러썼다.
*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의 글로벌 성별 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로 측정되는 글로벌 성평등 지수는 경제적 참여, 교육 수준, 건강, 정치적 권한 부여 등 다양한 측면에서 성 불평등에 대한 연간 평가를 제공한다. 2024년 8월 현재 아이슬란드는 과거 15년간 전 세계 성평등 지수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반면 한국은 해당 평가에 참여한 130여 개 국가 중 2024년 110위 등 같은 기간 동안 102~115위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과 비슷한 순위의 나라들은 칠레,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이 있다.
기존에 연재를 완료한 '엄마 혼자 버스 타고 아이슬란드'의 수정 버젼입니다.
다시 읽고, 기억을 되새기며 다듬고 있습니다.
회차에 따라 지난 연재와 내용이 동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