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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Sep 09. 2024

편집자가 말했다 글이 설익었네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편집자 A였다. 주방에서 분주하게 저녁을 준비 중이던 나는 가스렌즈의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담담한 척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쓰신 글에 힘이 있다는 것이 출판사 쪽의 이야기예요. 그런데..."

"아직 작가에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보인대요. 아이들이나 남편과의 관계에서나... 아직 스스로를 통과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그 과정 중에 있다 보니까 글에 날카로움이 묻어나고, 그렇다 보니 독자가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대요."

"그리고 18일 만의 여행기만으로 책 한 권을 풀어내기가 무리가 되는 부분이 없지 않고요."

"글을 계속 써보세요. 아이슬란드에 다녀와서의 일상에 대해 계속 써 나가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자고요. 아직은 좀 설익은 면이 있다고나 할까... 그러니 글을 좀 더 묵혀두고, 다시 들여다보고, 좀 더 객관화시키는 작업을 하면 좋겠다고 해요. 보통 3, 4년씩 글을 묵혀두기도 하거든요."  



편집자와 작가로서 20년 넘는 세월 동안 출판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소위 활자중독자였다. 지인이 소개한 그림책 모임에서 그를 만난 것은 내게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는 나의 아이슬란드 여행의 전반적인 준비 과정을 모두 지켜봤고, 이 일을 그냥 흘러 보내지 말고 책으로 엮어 볼 것을 독려했다. A4 용지 130 페이지가 넘으니 책으로 나온다면 족히 300 페이지가 될, 과히 적지 않은 분량. 그는 그런 원고를 5차까지 읽고 전반적인 의견을 덧붙여주었다. 보상은 없었다. 그리고 내 글과 결이 맞을 것 같은 출판사에 직접 원고를 넘겨주었다.



눈물이 났다. 내 글이 가진 정체성. 그러니까 아들과의 갈등에서 촉발된 아이슬란드행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잘 녹여내고 싶은 것이 나의 의도였다. 나는 그 두 가지를 자연스럽게 믹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행에서 느낀 벅찬 감동과 다시 집으로 온 이후의 삶의 온도차가 극명하여 나조차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나는 앞을 보고 나아가고자 했으며 그러한 다짐을 글에 담았다. 여행 준비기와 여행기에 이어진 후반부의 내용은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였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의 불안은 출판사에 정확하게 읽혔다. 그들이 내 글을 건성으로 읽지 않았다는 것. 내 글이 정확하게 읽혔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감동이었다.



"매일 메일함에 그날 투고된 원고가 수십 개씩 쌓인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그렇게 투고된 원고 중에서 책으로 나온 것은 딱 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 어느 편집자가 쓴 책에 언급된 내용이던가? 나는 그제야 현실의 장벽을 알았다. 책 한 권이 나오는데 3개월 정도. 그렇게 출판사에서 1년에 출간할 수 있는 책은 4권에서 많아야 6권. 한 권의 책을 제작하는데 딸린 인력, 시간, 돈을 생각하면 출판사 입장에서는 원고를 고르는데 신중에 신중을 가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출판사의 문을 두드려보고 싶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겨우 1년 3개월. 아직 지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모한 도전을 해 보고 싶었다. 곤조를 부려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더 용기가 나지 않을 것도 같았다. 누구나 독립 출판으로 쉽게 책을 내는 세상이라지만 가다가 어그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 그럴 가능성이 거의 백퍼센트지만 - 한 번은 정도를 밟아보고 싶었다. 작년에 공저를 한 권 내기는 했지만 그건 짧은 글 몇 편만 써서 내면 되었기에 수월했다.



어렴풋이 인식만 하고 있던 병명을 의사가 정확하게 짚어줬을 때의 왠지 안도되는 마음. 출판사로부터  받은 의견은 따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개운했다. "좋아요! 함께 일해봅시다!" 출판사에서 이렇게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좋았을 것이다. 무지 신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왠지 그 출판사를 못 미더워했을 것 같다. 시답지 않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어설픈 나를 한 번에 받아준다고? 어쩌면 나는 그러한 전제를 이미 깔아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글 괜찮은데... 아무래도 나는 그 과정에 밀착되어 있던 사람이니까요. 그들은 좀 더 객관적인 의견을 줄 수 있으니..." 말을 이어가면서 A는 일이 이렇게 되어 본인도 많이 아쉽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저도 글에서 그런 느낌이 들긴 했거든요. 아내로서, 엄마로서 주어지는 역할을 혼자 다 짊어지고 가는 느낌. 부수든지 터트리던지 할 부분이 있는데 그냥 꾹꾹 덮고 가는 게 답답한 면이 있었어요."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작가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확립될 때까지는, 그러니까 한 세 권 쓸 때까지는, 이렇게 부침의 과정이 있어요. 그러니 시간을 가지고 계속 써 나가요. 나는 좋은 작가를 한 명 발굴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보통 원고를 읽고 내게 피드백을 주는데 길어야 이틀. 그는 아무것도 아닌 내 글을 시간을 쪼개 읽고 신속하게 의견을 주었다. 그런 그가 출판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후 일주일 간 고심했다고 한다.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자였다.



<미오기전>의 김미옥 작가는 녹록지 않는 삶 속에서 40여 년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다져왔다. 평생 세상과 맞짱을 뜨며 살아온 그였지만 그의 글에는 설익은 신파가 아닌, 곰국처럼 오랜 시간 뭉근하게 우려낸 인생사가 있다. 추천사에 언급된 대로 명랑함과 서글픔을 오간다. 내가 좋아하는 이반지하의 책은 또 어떤가. 한국 사회에서 퀴어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그에게 시련, 모욕, 경제적 어려움 등은 일상사이다. 그럼에도 그의 책은 단단하다. 어려움 중에서도 담담함과 위트가 담긴 그의 책은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지난  달 동안  글을 읽고 또 읽으며 고쳐나갔다. 때로는 의욕적으로 열심히, 또 어떤 날은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여행의 기억을 복기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현실의 나를 마주 보고, 일으켜 세우면서 여러 번 울기도 했다. 값진 과정이었다. 결국 책을 쓰는 일은 틀어졌지만 나는 왠지 이 일로 작가 비슷한 길로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 나의 삶을 철저하게  들여다보지 않았고, 대강 덮고 가려했던 어떤 부분들을 찬찬히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그러한 용기가 생겼다. 전화를 끊고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지치지 말아야겠다. 일상에서 시선을 거두지 말고 하루하루를 살포시 밟아 나가야겠다. 그리고 조금씩이라도 계속 써나가겠다. 지금처럼. 그렇게 해보자고, 함께 가보자고, 나의 친애하는 글동무들에게도 마음속으로 속삭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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