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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외면하기

by 딴짓

오늘의 글방 글감:

- 당신의 영혼을 만나는 법

-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 정여울 작가의 부모 영향 이야기




흠.

오늘은(오늘도)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온라인 글방의 글감 앞에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다. 정여울 작가는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으로 부모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님의 ‘살지 못한 삶’으로 인한 어린 시절의 상처, 그리고 부모님이 반대하는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 견뎌내야 했던 불화.



내게도 그것이 ‘과거’라면 좋겠다.

본인들은 알아서 잘 살 테니 너는 네 가정이나 신경 쓰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주기적으로 사고를 치는 나의 친정 부모님. 그들로 인해 지치고 흐트러지는 마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 그리고 내 자식과의 일상에서 분개하고 무너지는 순간들. 며칠 그럭저럭 지내다가 또다시 나를 후려치는 무언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부모’라는 단어를 적는 것도,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다. 호흡을 깊게 가다듬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까마득한 내 어린 시절의, 결혼 전의, 성인이 된 내 아이들의 ‘과거의 단어’였더라면 나는 훨씬 더 차분하고 수월하게 이에 대해 쓸 수 있었을까. 거친 마음을 객관화하고,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천천히 속아 넘어갔다. 하느님은 가장 자비로워 보일 때마다, 실은 다음 고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루이스는 아내 조이가 서서히 죽어가자, 가망 없는 희망을 냉소적으로 풀어놓았다. 나에게 다음 고문은 뭘까. 나는 지금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



고등학교 최대 결석 일수는 60일 정도. 이를 넘기면 다음 학년으로의 진급이 불가하다. 오늘 아침, 학교를 가려고 나섰던 아들은 현관 앞에 섰다가 돌연 다시 들어와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2 종업식은 2026년 1월 7일. 등교 일로 아직 57일, 두 달도 더 남았다. 그날들이 너무나도 까마득하여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남은 날은 7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는 졸업 할 거라고, 알아서 한다고, 친구들이 있어서 학교는 갈 거라고 큰소리를 치던 녀석은, 몇 시간째 제 방에서 나오지 않다가 갑자기 방문을 벌컥 열고는 엄마인 나를 저격하기 시작했다. 이제 일주일 남은 거 알고 있냐고. 엄마가 도움이 안 된다고. 엄마 때문이라고.



내 안에서 뭔가가 또다시 와장창 부서졌다. 아들을 비난하고 저주하는, 지독한 염증 같은 말들이 입안에서 들끓었다. 지난 3년간 거의 매일 네 담임들과 연락을 하고, 그렇게 매일 너의 출석 여부를 챙기고, 수시로 마음이 무너지고, 다시 마음을 달래며 방문을 두드리고, 밥을 차리고, 밥을 먹는 네 얼굴을 살피고, 감사해하려고 노력하고, 언제 집에 오려나 기약 없이 기다리고, 남은 날들을 세고, 학교를 그만 두는 게 대수겠나라고 생각하며 또 마음을 달래고, 그리고 그리고.......



나는 노트북 가방을 둘러메고 나왔다. 어제 축구 대회에서 다쳐 오늘 아침 정형외과에서 다리에 깁스한 작은아들에게는 커피 한잔 마시고 오마, 라고 말했다.

산책로의 벤치 바닥이 차가웠다. 30분여를 바람을 맞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서러웠다.



『아직 아들과 잘 살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 나는 아들과의 일상을 다룬 전자 책을 냈다. 사춘기 아들과의 부대낌 속에서도 작은 깨달음과 소소한 성장, 감사함과 일상의 행복들, 엄마다운 기다림. 제법 그런 것들을 흉내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에게 코웃음이 난다. 적어도 너 스스로에게만은 진실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다른 생각을 하고 싶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주어진 글감에 어울리는 속 깊고 점잖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마음이 넓고 자유로워지고 싶다. 점점 더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지는 내가 아니라, 내 세계만 턱이 빠질 정도로 질겅질겅 곱씹고 있는 내가 아니라, 이 빌어먹을 삶에서 끌려 나와, 나란 존재를 가뿐히 넘어, 저 큰 세계와 연결되는 내가 되고 싶다. 그러고 싶어 미.치.겠.다.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 나는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나는 참 좋은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버겁다. 내 스스로를 포함해서.

그래서 나는 오늘도 허겁지겁 책을 펼친다.



‘당신의 영혼을 만나는 법’이라는 오늘의 글감 앞에서 나는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다. 최악의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는 것. 그렇게 한동안 책 사이에 숨어 가뿐 숨을 헐떡이다가, 내 안이 잠잠해지면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 것. ‘자, 이제 어쩌지?’

내 영혼과 다시 만나는 법은, 아마도 그런 것이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은 나도, 너도, 내 영혼도 다 잊고 싶다. 처음부터 몰랐던 것처럼, 다 모르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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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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