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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년

by 딴짓

“니가 인간이냐!”
거칠게 현관문을 열고 나가다가 다시 현관 안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로, 거실 탁자에 앉아 밥을 먹고 있던 아들의 뒤통수에 침을 뱉듯 고함을 내질렀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집에 오고 싶을 때 오고! 처먹고 싶을 때 밥 차려달라고 하고! 알아서 한다며? 저녁 일곱 시에 일어나서 뭐가 그렇게 당당한데?”

“그래서 뭐 어쩌까.”

아들이 싸늘하게 말했다. 천연덕스럽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아직 유급 안 당했잖아?”
“야이씨…… 너……”

내 안의 모든 악마가 바로 입술 뒤에서 내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올 참이었다.


꽝. 나는 거칠게 문을 닫고 나왔다. 4년째 이웃 관계이며,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이라던 고3 아들을 둔 앞집 엄마가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1층 현관에 서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낮게 뜬 보름달이었다. 그렇게 크고 동그랄 수가 없었다.

‘지랄 맞게도 밝네.’

저녁 아홉 시. 하천에는 러닝하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성큼 선선해진 날씨에 다들 나왔나 보다. 아줌마도 달리고, 아저씨도 달리고, 아가씨도 달리고, 또 아가씨가 달리고 있었다. 엄마와 어린이가, 연인들이, 아내의 러닝메이트로 남편이 보조를 맞추며 달리고 있었다. 모두가 평온하고, 무탈해 보였다. 그런 사람들이 참 많기도 했다.

ㅡ 예예, 건강 잘 챙기셔서 불로장생하셔요들.

그들을 째려보았다. 아니꼬웠다.


나는 러너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오른편 하천 쪽을 바라보며 걸었다. 어둠 속에서 나무들이 무심히 서 있었다. 하천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ㅡ 야, 그것밖에 못하냐! 꽝꽝 좀 쏟아내라고!

나는 뭐라도 되는 양 하천을 꾸짖었다.

그러다 하천 쪽 풀 길 쪽으로 길게 늘어선 내 그림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ㅡ 야.

나는 그림자를 불러보았다. 그림자는 나와 마주치자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 쟤는 건들지 말자.

하천 농구장을 지나쳤다. 농구하는 학생의 공을 뺏어서 냅다 집어 던지는 상상을 했다.

아 그런데 콩쥐 팥쥐 얘기는 너무 편협한 거 아니야? 팥쥐와 팥쥐 엄마의 입장도 있을 텐데. 흥부 놀부 이야기의 놀부도. 놀부가 성질이 고약해진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잠깐 넘어 올래? 언니가 갈까?”
촉이 또 발동된 건지, 때마침 친한 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언니……”
겨우 두 살 차이. 그걸 떠나서도 사십 대 중후반의 중년. 나는 언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엄마 잃은 아이처럼 훌쩍였다.

작은 아이에게 숙제를 내주고, 남편에게는 바람 쐬고 올 테니 빨리 집에 와달라고 메시지를 보내 답을 받은 상태였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잠시 망설이던 나는 광역버스에 올라탔다. 그 시간에 언니네 동네에 가본 적은 없었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지난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나는 연신 하품을 하며 어두운 창 밖을 쳐다보았다. 추리닝 반팔에 반바지, 맨발에 슬리퍼 차림. 선선한 저녁 기온에 버스 안 에어컨 바람까지 더해져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이를 탓하거나, 비난하거나, 기타 부정적이고 감정적인 말을 쏟아내지 말 것.’ 오늘 나는 딱 그 반대를 했다. 육두문자를 참은 게 그나마 잘한 걸까. 평생 수도권에 살아온 덕분에, 아니 그 탓에, 알고 있는 욕의 범위가 다채롭지 않다는 게 다행이었나.


“너 잘하고 있어. 대견해. 힘내. OO이를 좀 더 기다려주자.”

집 앞에서 나를 내려다 주며 언니가 내 손을 잡았다. 통통하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우리는 아픈 부모님과, 각자 아들들의 소소한 일들, 또 소소하지 않은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깨를 토닥였다.


정신 온전하고.

밥 잘 먹고.

잘 자고.

집에 오고.

......그래.

끝까지 못돼 쳐먹을 뻔했던 나는 다시 나를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부엌으로 가 찬물 한컵을 꿀떡꿀떡 마셨다.

오늘도 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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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