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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ul 04. 2024

아이슬란드 인들의 아지트 OOO

아줌마 아저씨들의 핫플

수… 수영장?  



아이슬란드 제2의 도시 아퀴레이리. 이 도시의 3대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안내책자에 언급된 동네 수영장에 나는 또 한 번 의아해했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큰 수영장? 얼마나 대단하길래.



화산으로 인한 지열과 온천의 나라 아이슬란드. 야외 온천지인 블루라군(Bluelagoon)은 아이슬란드에 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동네마다 군데군데 무료 온천 체험지가 있다는데 나는 지금까지 패스해 왔다. 우선 블루라군은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불가한 지역이라 뚜벅이인 나로서는 버스투어를 신청해야 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유명지를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10만 원이 넘는 입장료를 내고 가야 할지. 온천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많이 가봤는데 싶은 생각. 물론 에메랄드 빛 물과 뷰는 끝내주겠지만.



불현듯 나이 지긋한 아이슬란드 아저씨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블루라곤 가봤남?”

“아… 아뇨.” (또 블루라곤 자랑인가)
“블루라곤 좋지. 그런데 비싸잖아. 우리나라에는 동네마다 수영장이 있거든? 그 물이 그 물이야! 값도 엄청 싸고. 거길 가.”



아저씨 최고.  


Akureyri Swimming Pool. 위치를 확인해 봤다.

뭐야, 집 앞에 있는 저거, 수영장이었어?

걸어서 1분 거리.

우리나라 돈으로 만 이 천 원 정도.



가야지. 이건 가야지.  



아퀴레이리에서의 셋째 날 아침. 나는 수영가방을 들고 룰루랄라 나섰다.







수영을 못 한다. (운전도 못해, 수영도 못해…)
고로 이곳의 방문은 순전히 노천탕을 체험하기 위함이다.



탈의실의 라커룸을 여닫는 것을 헤매고 있으니 할머니가 매의 눈으로 쳐다본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바디랭귀지로 알려주시고는 내가 제대로 따라 하니 오옳지, 하는 표정으로 흐뭇해하며 사라진다. (이때 제대로 했었어야 했는데……)




평이한 수영장이다. 그래도 성인용 수영장 2개, 어린이용 2개, 몸을 따듯하게 해주는 스파탕 3개, 스팀사우나 1개에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슬라이드도 3개가 있다. 성인 풀 한 곳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강습을 받고 있고, 자쿠지에서는 연세 지긋하신 아줌마, 아저씨들이 앉아있다. 어린아이들도 몇, 외국인은 거의 없다. 여유로운 평일의 수영장 모습이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아, 그리고 수영장은 야외에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나도 그중의 한 스파탕에 몸을 담근다. 한국처럼 ‘앗 뜨뜨’, 하다가 ‘어 좋다’, 혹은 ‘녹는다’ 싶은 온도는 아니다. 적당히 따뜻하여 몸을 담그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오전 10시. 삼삼오오 탕 안에 모인 푸짐한 덩치의 그녀들. 소곤소곤 까르르까르르 하는 소리에 나 또한 슬며시 웃음이 난다. 분명 자주 만나는 사이일 텐데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나누는 양 목소리를 낮추다가 대화 중간중간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곤 한다. 반면 근엄한 표정의 아저씨들은 띄엄띄엄 앉아있다가 남성 지인이 나타나면 눈인사를 하고 고개를 까딱이고 몇 마디 낮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어딜 가나 비슷한 이 장면이 재미있다.



책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의 저자도 아이슬란드의 수영장에서 만난 여인들을 묘사한 적이 있다.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에서 발췌



아주머니들의 소곤소곤 비지 않는 오디오가 자장가처럼 잠을 부른다. 5월의 하늘은 맑고 따뜻한데 정면에 보이는 산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있고, 탕 안은 적당히 따땃하고, 그렇게 몸과 마음이 나른해져 온다. 나는 수영장 타일에 기대어 한참을 자다 깨다 한다. 탁 트인 야외에서 느끼는 청명한 공기. 여기에서라면 하루 종일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주머니들과 눈인사를 하고 나왔다.



헉. 샤워실 입구에서 봐도 저 멀리 내 라커문이 열려있다. 헐레벌떡 뛰어가본다. 아까 내가 뭔가 헤맸었는데 역시나 제대로 잠가지지 않았나 보다. 뒤돌아서 확인해봤어야 했는데. 다행히 없어진 것은 없다. 잘 가져가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라커문 앞쪽에 떡하니 스마트폰과 지갑을 나뒀는데도. 아, 안전한 나라 아이슬란드. 감사해요. 아이슬란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꼽힌다.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에서 발췌




“Swimming pools are very important in Iceland.”

아이슬란드에서 수영장은 중요한 존재야.



이후 여행 후반에 다시 만난 도서관 사서 릴랴는 내게 수영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아이슬란드에는 동네 곳곳에 공영 수영장이 있는데, 가격이 매우 저렴하고, 특히 은퇴자에게는 무료라고 한다. 수영과 온천 사우나는 기본적으로 건강에 좋은 데다가 동네 수영장은 다양한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동네 사랑방 같은 존재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공공 운동 시설이 많이 있지만 이렇게 촘촘한 동네 네크워킹을 위한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아빠는 2년 전에 퇴직하셨는데, 그때 이후로 매일 하루 두 세 시간씩 수영장에 계셔. 어떤 날은 하루 두 번도 가고.

탕에 앉아서 동네 사람들 만나 이야기하고, 무료 커피도 마시고 오는 거지.

그 사람들이랑 점심을 먹기도 하고. 누구네 집에 가서 음식을 해 먹기도 하고. 참, 얼마 전에는 같이 여행도 다녀왔다니까.  

아빠가 일할 때는 한 동네여도 왕래 없었던 아저씨들인데 지금은 얼마나 친해졌는지 몰라.    



나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여든이 넘은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근처에 사는 친구가 없어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차를 몰고 고스톱을 치러 가시는데, 몇 차례 자잘한 접촉사고가 있었고, 운전면허증을 압수해 버리겠다고 자식들의 협박 아닌 협박을 받고 있는 중이다. 나는 씁쓸해졌다. 부러웠다. 이렇게 시선이 탁 트인 야외 탕 안에서라면 꼬장꼬장한 우리 아빠도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만, 우리나라 남자 은퇴자들은 다 뭐 하고 있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친구가 있다.

각자도생 하지 않는다.

돈을 쓰지 않아도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이 있다.  



사람을 본다.

인생의 구간 구간에 맞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고로 누구나 자연스럽게 노년을 맞을 수 있다.

외롭지 않다. 두렵지 않다.  



그렇게 나는 오늘 아이슬란드 인들의 대단치 않은 아지트를 경험했다.

그들이 정책을 만들 때 중요하게 여긴다는 '누구나 이용 가능하고(accessible)' '지속가능한(sustainable)' 그런 곳.


친정 아빠께 안부 문자 한 통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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