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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ul 03. 2024

고정관념 파괴 나라

그게 뭐든지 간에

부스스 일어나 조심스레 커튼을 걷는다. 창 밖의 풍경을 응시하며 가만히 감탄한다. 파란 하늘, 구름, 언덕길, 비가 왔었는지 살짝 젖은 도로, 언덕길을 노련하게 내려가는 자전거 탄 직장인, 정면으로 보이는 항구의 하얀 배 두 척.


때마침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에 숨을 죽인다.


뺄 게 없다. 나는 이 풍경이 벌써 그립다. 노트를 꺼내 ‘그립다’라고 쓸 때 감정은 이미 쓸쓸함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아이슬란드에 온 지 7일 차, 아직 여행이 끝나려면 열흘이 남았는데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발끝에 매달린다. 아직은 아니야.

 




에밀리아나 토리니는 아이슬란드의 여성 뮤지션이다. 꿈속을 헤매듯 잔잔하고 신비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오늘 아침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다정한 이가 챙겨준 쿠커를 꺼낸다. 코펠과 버너가 일체형인데 코드만 꽂으면 뭐든지 지어먹을 수 있다. 오늘은 마트에서 산 봉지 쌀과 계란 하나를 넣어 계란밥을 만들어 먹었다. 이번 숙소는 뷰가 좋은 개인 룸과 욕실이 제공되는 대신 주방이 없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지만 밥 짓는 냄새가 날까 싶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계란을 쪄라.'



아이슬란드에 도착 직후, 살인적인 물가에 지레 겁을 먹고 집에서 챙겨 온 누룽지와 라면으로만 이틀을 때웠다. 그러고는 배가 고파 예민해졌다. 아직 낯선 상태여서인지 마트에 가도 물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푸념을 듣고 그녀는 계란 한 판을 사서 쪄먹으라고 했다. 계란과 유제품이 비싸지 않고 날도 덥지 않으니 3일에 한 번씩 마트에 들러 계란을 찌고 다양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가지고 다녔다. 이제는 잘해 먹는다. 가볍게 음식을 싸는 것도, 훌쩍 아무 음식점이나 들어가 먹는 것도 혼자라 가볍다. 깃털처럼 가볍다.      




배낭을 싸서 나섰다. 집 앞 성당 앞 벤치에 앉아서 언덕 아래 항구 풍경을 바라보았다. 15분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한번 더 듣고 일어났다.



“이게 뭐야…”



분명 안내 책자에는 아퀴레이리 3대 하이라이트라고 쓰여 있었는데. 황량한 식물원의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뭐가 더 있겠지 싶어서 걸음을 이어가다가 곧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봄의 시작인 이곳의 5월. 추위와 화산으로 이끼밖에 자라지 못한다*는 아이슬란드에서 나는 뭘 기대한 걸까. ‘보테니컬 가든(botanical garden)’이라는 이름만 듣고 나는 20년 전 캐나다 밴쿠버에서 본 아름다운 정원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경험에만 근거한 조악한 상상은 야무지게 깨져버렸다.





도통 흙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태그가 붙어있다. 언제, 누가, 어떤 씨를 뿌렸고 지금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가 쓰여 있다. 별 것도 아닌 거 같은 기록을 열심히 읽어본다. 한국에서는 절대 주지 않았을 시선이다. 식물원만이 아니다. 비록 역사가 짧고 척박한 자연환경이지만, 그러한 이유로 이곳 사람들은 티끌같이 작은 것도 소중하게 여기며 기록하고 보존해 왔다.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해 왔다. 그들에게 역사는 과거의 것이지만 동시에 지금을 살고 있는 자들이 온전히 알고 있는 것이다. 반면 오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5월의 한국에는 지천에 꽃이 널려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찾아야 한다. 작은 것의 존재함. 그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 그 감각을 되살리는 것. 오늘 아침 아이슬란드는 내게 그런 가르침을 주었다.




'고정관념 파괴 국가.'

나라 전체 인구라고 해 봤자 제주도의 반 정도. 제2의 도시라고 하는 이곳 아퀴레이리도 한국에서 내가 사는 시와 같은 크기지만 인구는 50분의 1에 불과하다.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 유명한 동상, 유명한 식물원… 가는 족족 나는 의아해했다. 나는 뭘 기대한 걸까. 그러니까 나의 기대감이라는 것은 전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 그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뭐든 많고, 빠른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의 시선에서 본 규모적인 기대였을 것이다.




기대하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여기에 뭘 보려고 왔나?

없음의 발견. 그렇다. 나는 여백을 찾는 여정을 하겠다고, 그것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물 흐르듯이 그 여정에 몸을 싣겠다고 여기에 왔다. 기대하지 않는다. 내 안의 고정관념을 깬다… 잊고 있던 'why'를 인식한 순간 가벼워진 몸이 더욱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렇게 내 안은 비어지고 또 뭔가로 충만해진다.





이제 이곳의 3대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라고 하는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그곳에는 또 뭐가 없으려나 기대하니 웃음이 난다.




그래도 이 식물원이 이 지역 3대 하이라이트라는 건 좀 심했다!

아이슬란드는 6~8월이 여름이에요. 8월의 식물원 사진은 5월보다 훨씬 예뻤답니다. ^^
* 아이슬란드에도 나무나 꽃이 있습니다. 자생된 건 아니고 임의로 심은 것이라고 해요.
* 화산 지형에는 이끼만 있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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