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었던 도고에서의 어느 하루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도고에서 맞이하는 가을비가 시원하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땅이 젖고 숲이 숨 쉰다.
나들이하기로 한 일정이 어그러졌지만 괜찮다.
숙소에 차분히 앉아 글을 쓸 수 있으니까 오히려 좋다.
그리고 비 오는 날 가장 알찬 하루를 보내는 방법을 도고에서 배웠다.
창문 밖으로 묘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바로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세차하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만 했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름의 묵은 때를 간단히 씻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우산 쓰고 차를 닦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도 집에 가서 해봐야지.
왠지 비가 기다려질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곳에 와서 집에서보다 밥을 잘 챙겨 먹는 중이다.
요리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참 좋은 순간이다.
주방에 주방장은 한 사람이면 족하다.
나는 옆에서 부지런히 돕는다.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면 바로바로 치우고, 조리하다 사용한 식기도구를 바로 세척한다.
모두가 하나씩만 도와도 요리는 금방 완성된다.
아침에 먹는 지옥에서 온 계란이 맛나다.
아침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계란 3개를 4명이서 나눠먹는 즐거움.
요리하고 정리하고 치우는 사람이 서로의 일을 미루지 않아 요리도 즐겁고 식사 시간도 기다려진다.
별 일 하지 않았지만 아침을 적게 먹어서 금세 배가 고파졌다.
점심은 바지락 파스타다.
아침 먹고 곧 점심을 준비하는 부지런한 사람들.
바지락 해감이 먼저다.
굵은소금이 없으므로, 식초로 해감을 1시간 한다.
우리들의 요리 선생은 유튜브다.
버터에 마늘을 볶는다.
마늘이 익으면 깔끔히 해감을 끝낸 바지락과 페퍼론치노, 청주 100g 넣고 바지락이 입을 벌릴 때까지 기다린다.
바지락이 입을 벌리면 물을 청주와 같은 양을 넣고 끓인다.
따로 삶은 스파게티 면을 바지락이 끓는 냄비에 넣는다.
그리고 간을 맞추고 면이 익으면 먹는다.
간단한 조리방법.
생각보다 소금이 많이 들어가서 놀랐다.
역시 음식은 간이 맞아야 최고다.
여기서 만든 모든 음식이 그랬다.
부족한 재료지만 서로의 힘이 합쳐져서 꽤 그럴싸한 음식을 만들어낸다.
먹다 보면 젓가락을 끝까지 놓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함께 하는 요리와 식사가 즐거워지는 중이다.
지난주 방문했던 시장정육점 사장님의 추천을 잊지 않았다.
도고 성당 뒤쪽에 있는 소나무 길이 걷기에 참 좋다고 하셨다.
배도 부르겠다. 가벼운 산책길을 나섰다.
왼쪽은 도고성당, 오른쪽은 소나무 길로 향하는 길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종교시설에 가게 되면 늘 긴장하게 된다.
조용하게 있다가 가겠습니다.
공간의 한편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당 앞의 너른 들판을 보고 계시는 성상에 인사드리고 소나무 숲 길로 향했다.
마치 신에게로 향하는 길 같이 조성된 길이다.
신실한 사람들이 한 발 한 발 걸을 때 기도드리기 좋은 조용하고 깔끔한 곳이다.
무신론자는 야트막한 동산을 산책하는 기분이 드는 곳이다.
모두가 함께 이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나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나무 사이로 보이는 도고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요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오늘은 정말 재미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장소를 바꾸어 이야기하기 좋은 곳으로 간다.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기분 좋고, 탁 트인 시야에 맺히는 너른 황금빛 평야가 평화롭다.
이런 게 바로 집이 아닌 카페에 가는 이유가 될 것이다.
2층으로 걸어 올라가 따뜻한 초코라테를 주문한다.
비가 오고 난 후 급격히 떨어지는 기온에 맞춘 주문이다.
손님이 적은 오후의 카페를 그렇게 접수해 버렸다.
영웨이브는 제로웨이스트 샵이다.
버려지는 병뚜껑으로 만든 빗과 키링, 천연치실, 온몸 비누 등 다양한 제품들이 구비되어 있다.
병뚜껑, 우유팩, 건전지 10개를 가져오면 세제 100mL로 교환해 준다.
쏠쏠한 재미가 있는 곳이다.
특이했던 것은 바로 휴지 대신 손수건을 이용하게 한 것이다.
우리가 가볍게 쓰고 버리던 휴지를 이렇게 대체하는 카페를 처음 봐서 놀랐고, 환경을 지키는 일에는, 정말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카페투어를 끝내고 자리에 앉아 오늘의 할 일을 바로 실천했다.
바로 이상형 쓰기이다.
내가 바라는 이상형을 카테고리별로 나누어 생각하고 작성한다.
취합해서 내가 연애할 때 바라는 이상형과 결혼할 때 바라는 이상형 5가지를 정하고, 자기가 원하는 이상형의 기준에 스스로가 맞는 사람인지 자아성찰까지 하게 되는 이상향에 대해 그려보는 것이다.
여성 4명으로 시작했지만, 1명의 남성 청자가 더해지니 대화가 풍성해지고, 모호했던 생각이 선명해졌다.
첫 번째 카테고리는 외모다.
외모는 대체적으로 깔끔하고 청결한 사람을 선호했다.
하루에 한 번 꼭 샤워하기, 옷을 단정하게 입는 사람을 모두가 말했다.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똑같다고 느꼈다.
두 번째 카테고리는 성격.
각자의 취향이 뚜렷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모두가 공감했던 우리가 원하는 성격에는 다정함이 학습된 사람, 청자를 생각하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 예측 가능한 사람으로 꼽혔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다들 원한다.
세 번째 카테고리는 습관.
습관은 정말 다 달랐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상대방의 습관을 이야기하자면,
매운 음식을 한 테이블에서 먹을 수 있는 사람, 입 안의 음식을 다 삼키고 말하는 사람, 하루 한번 기분 또는 안부를 묻는 사람, 타인의 서랍을 함부로 열지 않는 사람, 설거지와 세탁을 미루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바라는 것이 생각보다 많구나 느낀 순간이다.
네 번째 카테고리는 가치관.
가치관에는 경제, 정치, 사회문제가 포함된다는 부연설명을 더한다.
기준 금리를 아는 사람, 정치에 관심은 많지만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 저축액보다 소비를 적게 하는 사람, 한 사람의 최선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 감사함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다섯 번째 카테고리는 환경.
의지할 사람이 있는 사람, 자기 주제를 아는 친구들, 서로에 대한 믿음이 공고한 가족관계, 조부모와의 관계가 완만한 사람, 돌아갈 추억의 장소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대체적으로 외모를 제외하고 각자의 취향이 뚜렷하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았다.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다정하고 배려심 있고 배움을 가까이하는 사람을 원한다.
과연 나는 이러한 이상형에 부합하는 사람일까.
자아성찰이 시작됐다.
내가 바라는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사람인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지만, 모두 다 하기 힘든 일들을 나열한 글이었다.
나의 이상형은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재미로 시작한 글쓰기가 나를 들여다보게 하고, 온전히 나를 더 이해하게 해 주었다.
혼자라면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신기한 매일을 경험 중이다.
그렇게 하루종일 일정이 비어있던 여유로웠던 하루가 다채롭게 채워지는 온전한 하루를 맛보았다.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 즐겁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더없이 고마운 매일이다.
2주를 어떻게 보내지 하며 걱정했던 나날들이 이제 꿈같이 느껴진다.
집에 갈 날이 기다려지지만, 조금 늦어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귀찮게만 느껴지던 밥 먹기도 직접 만들어먹으니 한입 한입이 소중하고, 이제 뭘 하지 고민할 새에 이거 합시다 제의하는 사람의 의견이 반갑다.
생각정리를 위한 산책길이 아름답고, 가까운 카페에 들러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
약속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만날 수 있고, 상대방의 이야기가 기대되는 내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여유로운 내가 되니, 나의 하루가 이렇게 풍성해진다.
진한 밤이 되어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기회가 주어지면 바로 달려가는 이유다.
생각보다 더 멋진 삶은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이야기를 듣는 소중한 밤을 맛보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숙소로 돌아왔다.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질 듯 가득하다.
비가 온 후의 하늘은 맑고 깨끗하다.
밤하늘의 별을 더 밝게 만드는 요술을 부린 아침비가 생각난다.
오늘은 깊은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들고 싶은 밤이네요.
좋은 밤, 좋은 꿈 꾸며 깊은 잠에 들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