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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준수 Jul 10. 2021

술이 달다 술맛을 알아간다

당신에게 들려드릴 '오늘의 맛' #4

“나이가 들수록 좋은 술을 마셔야 돼”     


술을 끊은 내게 지인이 했던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 ‘30대가 되면 어느 순간부터 건강을 지키기 위해, 술을 편하게 마시기 위해 운동을 한다’고 했던 아재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이제 인생 1/3 정도 지났지만 내 짧디 짧은 삶에서 비교 대상이라고는 20대와 30대밖에 없어서 그런지 10년 전 나를 기준으로 삼곤 한다. 지금은 꿈도 못 꿀 일들을 과거에는 해냈다. 생각해보니 10년 전 나와 경쟁하는 건 힘든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쌓이는 부분들은 미래의 내가 더 유리하겠지만 빛과 시간이 지배하는 나이라는 녀석은 한낱 인간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지인이 말했던 술도 비슷하다. 술을 많이 마실수록 간의 해독 능력을 떨어지지만 알코올에 대한 익숙함이 늘어간다. 20살이 되기 전에 술을 마시면 양아치가 될 거라는 생각에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술을 입에 댔다. 그때 느꼈던 맛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이게 쓴맛인가’ 싶은 이상한 맛과 혈관을 타고 따뜻한 액체가 퍼지는 느낌이 났다. 그 후 7·8년 정도는 술맛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마시기만 했는데 아마도 취하는 느낌, 몸이 편해지는 기분이 좋아서 들이키기만 했다.     


우연히 맥주로 유명한 유럽의 한 도시에서 흑맥주를 마신 적이 있다. 한국에 있을 때 “맥주는 배불러서 좀 그래”라고 했지만 그곳에서 1 파인트짜리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머리가 핑 돌았다. 워런 버핏이 말하는 자본의 진실이나 유재석이 들려주는 코미디의 가치, 봉준호가 말하는 한국 사회와 계급론에 관한 이야기처럼 경험하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묵직한 무언가를 맞닿뜨렸을 때 느낄 수 있는 거대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흑맥주가 한국 맥주보다 더 좋은지 여부는 아직도 판단하기 힘들지만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날 술을 마시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달의 뒷면을 망원경으로 관측한 기분이었고 술에도 맛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삶이 힘에 부칠 때 혼술을 하면서 술기운으로 기분을 누를 때가 있다. 취기는 알코올의 여러 역할 중에서 현대인이 가장 좋아하는 기능이기에 마시고 취하려고 한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적당히 마신다면 평균치의 기분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물론 많이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고 만악의 근원이 되지만 말이다. 한동안 나 역시 그렇게 음주를 했다.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삶이 가끔 재밌는 이유는 내가 마신 술처럼 우연히 다른 면을 보기 때문은 아닐까. 취하기 위해 마시지만 술은 원래 음식이라는 점도 그랬고 물을 마시고 수인성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커 술로 만들었다는 술의 기원과 관련된 설도 흥미로웠다.      


얼마 전 영화 한 편을 봤다. 배우 이솜 씨가 연기한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가 눈에 뗬다. 그는 위스키를 사랑한다. 돈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집이 아닌 위스키를 선택한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라는 그의 대사는 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술맛을 느끼는, 삶의 다양한 면을 바라보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겠다는 뜻은 아닐까. 가끔 술맛이 단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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