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들려드릴 '오늘의 맛' #5
예전에 외국인들과 함께 산 적이 있다. 평소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웬만한 재료는 냉장고에 손질한 채 넣어뒀고 한국 슈퍼나 아시아 마켓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브라질에서 온 B는 매일 음식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그날따라 부엌에 자리 잡고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태국인 친구가 놀러 오는데 음식을 해주려고 한다면서 “혹시 고추 있어?”라고 물었다. 땡초 하나가 있긴 했는데 “이거 엄청 매운 고추인데 괜찮겠어?”라고 답했고 재료를 빌려줬다. 양파 하나 썰 때 눈이 매운 걸 못 참고 물안경을 쓰는 녀석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고 청양고추를 썰던 친구는 비명을 질렀다. 결국 그날 요리는 내가 해줬다. 태국식 볶음 요리를 하려고 했다는데 하다 보니 한국식으로 만들어버렸다.
다행히도 B의 태국 친구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오랜만에 매콤한 음식을 먹어서 좋았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생각보다 맵네요. 먹자마자 냄새가 확 느껴져서 놀랐어요”
나라마다 ‘맵다’의 정의가 다르다는 걸 이때 알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만 해도 고추를 잘 못 먹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추에서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보다 마늘의 매운맛인 알리신이 더 몸에 맞는다. 생마늘을 그렇게 먹어도 맵다는 생각이 안 들지만 고추는 살짝만 매워도 눈이 시큰하다.
개인적으로 느꼈던 태국이나 멕시코산 고추는 매운맛이 서서히 올라오는 경우가 많았다. ‘맵다’는 한 단어로 표현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그 맛은 모두 다르게 느껴진다. 요즘 유행하는 마라탕의 마유와 라유, 짬뽕에 많이 사용하는 고추기름은 모두 비슷한 기름 성분이지만 입안에서 느껴지는 맛은 모두 다르다. 얼얼하거나 알싸하기도 하고 입에 불이나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우리는 이때 한결같이 ‘맵다’고 한다.
우리는 가끔 어떤 단어로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전부 표현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는 문화권에서 저마다 다른 형태로 낱말이 만들어지지만 쓰는 사람에 따라 그 기준은 조금씩 달라진다. 매운걸 잘 못 먹는 외국 친구에게 불닭볶음면을 맛보라고 한다면 그 친구는 경악할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게 그 맛은 ‘먹을만하게 매운’게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썼지만 매운 느낌을 표현하는데 ‘맵다’ 말고 다른 말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입 밖으로 꺼내려면 말문이 막히는 경우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워낙 매운 음식을 좋아하니 딱히 매운 정도를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매운걸 잘 못 먹는 소위 ‘맵찔이’들은 어릴 적부터 등짝을 맞으면서 먹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