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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Jun 04. 2023

새로운 시대의 소통을 꿈꾸며.

급변하는 시대, 창작가로서의 소명의식.

[1] 


회사를 나오기 전, 경직된 매일이 고단했다. 아트 디렉터가 가시 돋친 딱딱한 업무와 일상에 고통받는다는 것은, 단단히 굳은 메마른 땅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일 뿌리를 뻗지 못해 당혹스러운 나무의 사정과 같다. 창의적인 자극을 받아들일 통로가 막힌 상태로 멍하니 뙤약볕 밑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썩어 없어질 날을 앞당기고 있는 것이다. 시원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으나 당장 살길은 찾아야 했다. 결과물의 질이나 과정의 합리성에 연연하지 않는, 오로지 창작을 위한 창작 활동을 매일 조금씩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2] 


기분이 전부인 내게, 미지근한 커피 같은 나날들은 없던 힘이 솟기는커녕 쉬운 일도 어렵게 만들곤 했다. 늘 부족하기만 한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나에게 취미가 있던가? 아, 기억났다. 사진은 어릴 적 가장 좋아하던 여가활동이었다. 일상의 사진을 찍는 것이라면 추가적인 에너지를 크게 소모하지 않고도 즐겁고 꾸준하게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버려놓았던 카메라를 다시 꺼내어 들었다. 동기부여도 할 겸, 다른 작업들을 보며 영감도 받을 겸, 인스타그램에서 익명으로 사진계정도 열었다. 



[3]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고 한국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기 시작한 생경한 단어는 '소통'이었다. 소셜미디어에서의 소통이란 서로 좋아요도 누르고 댓글도 달고 종종 담소도 나누는 상호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소통해요", "소통하고 싶어요"라는 말은 참 적극적이다. 사막 같은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경악했다. 고작 내가 찍은 거리 사진 몇 장 본 것 만으로 나와 알고 지내고 싶어 하다니! 인간에 대한 실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나에게 무슨 관심이 있겠어, 팔로워를 늘리려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여지없이 냉소적으로 받아들였다. 



[4]


일부는 이기심으로 접근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 정도는 웃어넘길 법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뜻밖에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관계를 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 나와 나의 작업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주는 사람들, 호의를 가지고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 이런 이들을 만나는 것이 사람을 사귀는 평범한 과정에서 당연하게 기대되는 부분이었던 적도 있었을 텐데, 너무 오래간만이라 잊고 있었다. 매일 사진을 올리고, 서로 부담 없이 응원의 흔적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신뢰가 쌓였고, 안 보이면 걱정되고 나타나면 반가웠다.  



[5]


수개월 시간이 흐르자, 창의적인 자극을 위해 사진을 찍어 매일같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건지, 그곳에서의 '소통'이 좋아서 성실하게 취미활동을 하고 있는 건지 구분이 어려워졌다. 점차 사진이 불특정다수에게 얼마나 멋져 보일까 신경을 쓰는 비중은 적어졌고, 그런 만큼 팔로워도 처음만큼 급등하지는 않았다. 대신 내가 어떤 엉뚱한 시도를 해도 참을성 있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몇몇 분들이 나타났다. 의미 없이 늘리는 팔로워의 수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분들 생각에 나는 바쁠 때도 잠깐씩이라도 매일 계정활동을 했고, 작품이라며 찍는 사진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근황도 자주 공유하게 되었다. 깨달았다. 창작활동으로 나의 생각의 근육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진정 나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건 창작에서 비롯되는 선하고 의미 있는 소통이었다. 



[6]


창작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의 소통은, 시각적인 소통으로 시작하여 말과 글이 주가 되는 소통으로 은은히 이어진다. 주로 소통이라 하면 순수하게 언어적 의사소통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창작예술도 궁극적으로는 소통을 위한 것이며, 특히 시각적 언어의 경우 다른 언어의 형태보다 즉각적, 직관적인지라 순간의 시선을 끄는 것이 중요한 디지털 시대에 효용이 많다.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의 소비가 주로 이루어지는 소셜 플랫폼은 주목도를 올리는 것에 시각적 언어를 언제나 분명하게 이용하고 있다. 



[7]


소통할 온라인 플랫폼이 없던 과거에도 다양한 방법을 통해 사람들은 소통을 추구했다. 시대가 변하며 형식과 방법이 늘어나고 진화할 뿐, 다른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머리와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변함이 없다. 나 역시 소통을 갈구하며 살았고, 여러 소통 방식을 익히고 다양한 커뮤니티에 몸 담으며 갈증을 채웠다. 그렇다. 나는 소통을 좋아한다. 뜻밖의 깨달음이었다. 몰랐다기보다는 언젠가부터 무관심해졌기 때문이다. 마치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걸 몸소 깨달은 날 주변을 돌아보니, 먼지가 쌓인 채 가구가 되어버린 집 안 한 구석 낡은 운동 기구가 새삼 눈에 들어오는 식이다.

 


[8]

 

새삼스러운 깨달음에서 비롯된 사색의 시간, 되짚어 본 나의 삶 속 소통을 위한 고군분투, 그 목적. 핵심은 무모하여 간단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나의 방식으로 세상에 던져, 그것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되고 관성적인 물결의 파문이 되기를 원한다. 마음의 위로일 수도, 크고 작은 깨달음일 수도, 혹은 더 나아가 괴로운 물살의 흐름을 바꿔보고자 하는 의지일 수도 있다. 시각예술을 언어로 선택해 이를 이뤄보고자 했었지만, 삶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예술도, 나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모든 걸 잊은 채 그저 하루를 살아내느라 허덕이며 세월을 보냈고, 그렇게 조용히 길을 잃어 별일 없는 날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불행해진 것이었다.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싶어 안타깝지만,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딱 좋은 시기에, 행복해질 기회를 얻은 것이 또 마냥 기쁘다.  



[9]

 

글은 소통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어떤 형태로 완성되는 이야기라도, 글이 근간이 되어야 이해와 전달이 완전하기에 그렇다. 지난 시절 언젠가 내팽개쳤던 펜을 다시 붙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공지능과 함께 불어닥치는 이번의 혁신은 유난히 반갑다.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소통 방식을 완성할 실마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영어와 한국어 두 언어로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쉬워지고 있다. 미국과 한국에 딱 인생의 절반씩을 할애한 나에게는 쉽게 해결이 어려운 중요한 고민이었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투자하여 익힌 시각 언어 역시, 그 어느 시대보다도 든든하고 훌륭하게 소통의 확장을 위한 도구의 역할을 할 것이다. 



[10]


시대에 적응하는, 그렇지만 눈앞의 이득을 노리는 근시안적인 판단이 아니라, 가진 것에 급변하는 시대의 언어를 더하여 시공을 초월한 가치를 전하는 문학가이자 예술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 그렇게 변화하는 시대를 끌어안고 이뤄보려는 나의 꿈. 불안한 변화의 시기, 나는 섬세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가장 온당하고 격조 있는 방법으로 위로받기를 원한다.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희망과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나와 함께 새 시대를 항해할 방법을 찾기를 꿈꾼다. 심도 있는 사유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사연 많은 예술이 외로워지는 때에, 나의 꿈은 그저 미련하게 잔존하는 청춘의 패기일까, 아니면 조용히 다가오는 예술의 새로운 전성기에 필요한 거친 봄바람 일까. 

이전 01화 욕망하는 이방인들의 도시,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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