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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Aug 05. 2023

셰익스피어가 주제 파악 좀 하라 했다 (1)

아무것도 적지 못해 깨끗한 내 시험지가 새하얗게 빛났다.

학부 졸업을 위해 반드시 들어야 했던 교양 과목 중에 영문학이 있었다.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분석하는 식이었다. 미술 대학에서의 영문학 수업이 반가운 한국 유학생이 있을 턱이 없다. 아니, 보통의 미대생이라면 싫어하고 귀찮아 할 수밖에 없다. 전공 과제 하기도 바쁜데, 고전 영문학 책을 읽고 분석해야 하다니! 


학생들 사이에서는 여러 고달픈 교양과목 학점을 편하게 딸 수 있는 법이 공유되곤 했다. 어떤 교수의 수업이 점수를 잘 준다, 과제가 많지 않다, 시험이 쉽다 같은 정보들. 전공과목 역시 교수들의 수업 특성과 성격 등을 미리 동기나 선배들을 통해 알아보고, 본인에게 맞는 사람을 선택해서 수강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조금 더 특화된 정보가 공유되었다. 모자란 영어 실력으로도 비교적 패스가 수월한 수업이 가장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교수가 영어에 취약하고 문화적응이 덜 된 아시안 학생들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있는 경우, 혹은 수업 스타일이 우연히 한국 학생들에게 잘 맞는 경우가 있었다. 후자의 경우 토론이나 발표가 적은 수업이 좋은 예가 된다. 


영문학 수업 역시 당연히 그런 정보가 있었으나, 수강신청 기간에 원하는 수업의 자리를 꿰차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수강신청에 실패하여 한국인들 사이에서 정보가 없던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이 많은 교수님이었는데, 강의 중에 두세 번씩 당장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한 기침을 오랫동안 하시곤 했다. 


학생들에게 부담이 크지 않은 평이한 형식의 수업이었다. 이론적으로는 무척 수월해야 옳았으나, 나의 상황은 그와 별개였다. 영어 실력의 근거라고는 근본 없이 몇 달 공부한 토플과 유학 직전 급조한 영어 회화 수업 정도가 전부인 나에게 고전 영문학을 독해하라는 것은 마치, 집에서 달걀프라이도 가까스로 부쳐 먹는 사람에게 파인 다이닝 디너 코스를 차려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가진 건 자신감뿐이던 나는 긍정적이었다. '파인 다이닝 그거 뭐 별거 있나, 달걀을 한 번에 여러 개 능숙하게 부칠 수 있게 되면 되는 거 아닌가.'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읽어야 하는 작품들의 줄거리와 해석을 일단 인터넷에 있는 한국어 자료로 공부했다. 그리고는 미국에서 학생들을 위해 작품별 요약해석본으로 나오던 CliffsNotes를 사서 읽었다. 원작도 읽긴 했지만 도무지 독해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요약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전 문학에서 쓰이는 영어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영어나 현대 문학과는 많이 다르다. 그 당시 나에게는 미지의 새로운 언어로 여겨질 만큼 배움의 장벽이 높았다. 그때만 해도 스마트폰은커녕 디지털 번역기도 변변한 게 없었다. 어지간한 지식정보는 모두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유튜브 같은 플랫폼도 없었다. 전자사전으로 단어를 하나씩 찾아보는 것에 의지하여 혼자 독해를 제대로 해내는 것은 나에겐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긍정적이었기에, 나름대로 주제를 파악하고 중요한 이야기의 흐름을 아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제까지도 이 정도 하면 한국에서의 모든 영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으니, 분명 이번에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라는 천진한 믿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 그걸로 충분할 것이라는 좁은 경험에서 비롯된 낙관. 


시험 당일, 학생들의 책상 위로 시험지가 한 장씩 놓였다. 태평한 얼굴로 도착해 앉아 있는 내 책상에도 어김없이 시험지는 도착했다. 시험지를 훑어본 나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시험지를 받아 들고부터 교실을 나올 때까지,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기까지의 감정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잊고 싶을 법한 기억인데, 그때가 떠오르는 것이 싫지는 않다. 익숙하다. 내가 이제껏 헤쳐나가야 했던 모든 난관의 서사는 이때처럼 반복되는 것 같아서. 


시험지에는 문제가 몇 개 없었고 모두 주관식이었다. 질문에 관한 나의 해석, 나의 생각을 한 문단 정도로 서술하는 식이었다. 한국에서의 영어 시험이라면 당연히 나왔어야 하는 주제나 소재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게 예상 밖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기가 막혀 슬퍼지는 부분은, 문제도 잘 해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안다고 해도 나에겐 대답이 없었고, 대답이 있다 한 들 제대로 서술해 낼 작문 실력이 없었다. 이 언뜻 쉬워 보이는 수업과 교수의 정보가 한국인들 사이에서 전무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때서야 깨달았다. 


얇고 무심한 흰 종이 몇 장 앞에서 나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위험에 봉착했다. 낙제를 원하는 학생은 없다. 낙제는 쉽게 넘겨야 좋은 많은 일들을 복잡하게 꼬아놓기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날 길은 없는 것일까 머리가 얼얼해지도록 궁리해 봤지만, 모르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될 리 없으니 그야말로 의미 없는 짓이었다. 


날 좋은 오후였다. 내 정면에 위치한 강의실 큰 창에서는 햇살이 당차게 쏟아져 내렸고, 아무것도 적지 못해 깨끗한 내 시험지가 새하얗게 빛났다. 막다른 길에 몰린 절박한 사람은 옳지 못한 선택을 하게 되곤 한다. 옆에 앉아 평온한 얼굴로 열심히 시험지에 답을 적고 있는 남학생의 시험지를 흘끗 쳐다보았다. 답안이 가려져 있지 않았다. 뭐라도 읽을 수 있다면, 힌트가 된다면, 나도 시험지에 적을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으로 눈을 부릅뜨고 다시 바라보았다. 


절망 밖에 가져올 것이 없었다. 내가 알게 된 것은 나는 영어 손글씨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읽은 적이 없었으니까.  




얼마나 오래 멍하니 있었을까. 벌거벗고 앉아있는 것과 다름없는 기분이었다. 강의실은 조용하고 밝아 도망칠 곳이 없었다. 시간이 백 년쯤 지난 것 같았지만 정작 시계를 보니 시험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뿐이 지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한 맨 몸의 나는 어쩐지 용감해졌다. 볼 테면 보라지, 웃을 테면 웃으라지, 욕하려면 욕하라지. 


계속 그곳에 앉아 오갈 데 없는 마음으로 시간만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맞아야 할 매라면 빨리 맞는 것이 낫다. 내가 갇힌 상황과 장면을 빨리 바꿀수록, 내가 현재 볼 수 없는 다가올 미래의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된다. 지금 이곳에 없는 회생의 기회는 이다음 챕터에 있기를 기대해 볼 수밖에 없기에, 위기에서 필요한 건 정지버튼이 아닌 재생버튼이다. 


여러 장의 시험지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님이 있는 교실 앞문 방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의문 어린 시선들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벌거벗은 내 모습은 크게 주목받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내 모습을 주시하는 낯선 푸른 눈이 있었다. 최대한 눈을 피하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백지 시험지를 제출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득한 마음으로 입을 여는 순간 그가 나를 향해 시험지를 집어던졌다. 




그 후에 어떻게 교실을 빠져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출한 시험지가 다시 내게 날아오는 순간, 나의 머릿속은 시야를 가린 종이만큼이나 하얗게 텅 비어버렸다. 강렬한 오후의 태양이 폭발하는 것을 맨 눈으로 마주한 느낌이랄까. 그냥 나왔는지, 대화나 언쟁이 있었는지, 다른 학생들은 어땠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기억을 잃어서인지 생각보다 감정적인 타격도 적었다. 애초에 백지 시험지는 수업에 예의가 아니니, 그가 화가 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표현방법의 폭력성은 옳지 않았으며 나 역시 답답하고 억울했지만, 백지를 제출해 놓고도 뻔뻔하게 낙제를 면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옳고 그름이 나 억울함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행히도 학교는 사회와는 참 다르다. 특히 미술대학은 기본적으로 학생이 창의적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며 성장하기 위해 학비를 내는 곳이기 때문에, 교수가 학점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 같지만 그 범위는 제한적이다. 상대적 약자의 모자란 영어와 부족한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고, 의도가 올곧고 배움에의 의지가 있다면 대부분 수습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울타리 안에서 굴곡 있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나 자신의 언어문화적인 미숙함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지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후에 그를 다시 찾아가 최대한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고 사과했다. 리포트 같은 것으로 대체하여 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수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고, 생각보다 더 흔쾌히 이해와 승낙을 받아내었다.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낙제를 면할 방법이 생긴 것도 그렇지만, 덕분에 나는 답 없는 위기에는 진솔함이 최선이라 여기게 되었고, 그 어떤 상황도 거짓말로 극복하지 않는 사람으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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