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혹은 대담2

우울하거나 공허한 감정들을 끄집어내야 할 때가 있다.

by 갓구름
네 목소리 담배같아. 듣다보면 계속 듣고싶어져.


[111p] '프리허그'_이틀 휴가를 보내고 병원에 나가니 두 가지 기분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첫 번재는 기욤이 나와 함께 야간근무를 한다는 것, 그는 몸 아픈 동료의 자리를 대신 채웠고, 오후 6시에 출근 소식을 듣고도 쿠키를 구워왔다. 어쩌면 휴가때에도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모른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내가 인사를 하러 갔더니 로미오가 웃음을 지었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이해하고, 발전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내일 떠난다...나는 결국 그에게 애착을 갖게 되었다.

" 그건 좋지 않아요, 선배님도 아시잖아요!"

" 알아, 기욤. 하지만 저절로 드는 감정을 난들 어떡해. 어떻게 감정을 거스르지? 넌 방법을 알아?"

" 전 감정을 느끼지 않아요, 그럼 애써 싸우지 않아도 되죠."

" 말도 안돼."

"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어요."

" 그러니까 어떻게?" "그건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전 애착을 갖는 게 싫어요, 애착을 가지면 필연적으로 마음이 멀어지는 날도 와요. 그럼 고통스럽고요."

" 마음이 멀어지는 고통을 겪지 않고도 누군가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어."

" 그렇게 생각하세요?"

" 모르겠다."

" 선배님이 환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애착을 가져도 좋아요.

단, 조심하세요."

" 애착을 갖는 것하고 사랑에 빠지는 일은 별개야."

" 때로는 경계가 모호해요."

" 난 안 그래."

" 아몬드 쿠키 드실래요?"

" 거봐, 이를테면 난 너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지만 너한테 깊은 애착을 느껴."

기욤이 웃으며 말했다. "애석한 걸요."

"애석해하지 마."

" 왜요, 그럴래요. 전 선배님 얼굴이 빨개지면 기분 좋아요."

" 난 빨개지지 않았어."

" 귀까지 새빨간걸요. 거울 보여드려요? 저보다는 제가 만든 음식들에 애착을 가지는 거겠죠."

" 넌 내 얼굴을 빨갛게 만들고 살찌게 하는구나, 자랑스럽니?"

" 선배님이 다른 이유로 살쪘으면 해요."


기욤은 미간을 찌푸리고 이마에 주름을 몇 줄 만들어놓은 채 서류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턱이 쉼 없이 움찔거린다. 습관이다. 이 남자, 외모는 온화하나 늘 긴장하고 있다. 그의 내면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는 말수가 매우 적다. 때로는 나도 그처럼 되고싶다. 있는 것을 쏟아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마음속에 담아두어도 고통스럽지 않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기욤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그러는가? 침묵하는 사람은 괴롭지 않다고 누가 그러는가? 사회가 강요하는 모습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침묵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회 생활을 하면 울 권리도 없고, 웃을 권리도 없으며, 사랑하고, 애착을 가질 권리도 없다.


분노는 억눌리고, 웃음은 의심받는다. 하물며 친절함은 말해 무엇할까. 나는 기욤을 바라보며 좀 전에 그가 암시했던 바를 곱씹는다. 그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면 애석한 일이고 나이차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듯하다. 혹시 내게 무언가를 이해시키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기욤은 왜 자제하는걸까? 나는 아무도 잡아먹은 적이 없는데.


[147p]

"네가 뭘 어 쩔 수 있겠니."

"알아요."

"그래도 네가 정말 많은 도움을 줬구나, 그 애가 오래도록 기억할거다. 어쩌면 영원히.'

"그 앤 너무 어려요. 제가 열네살 땐 치마에 양말을 신은 채 공부에만 신경 썼지 남학생들한텐 관심도 없었는걸요."

"그 애는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아직 판단하기엔 이르다만, 이를테면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애한텐 남학생들과 나누는 사랑이 돌파구 아니었을까?"

"그게 정말 사랑일까요?"

" 적어도 환상은 되지. 사랑을 못느끼니까 자꾸 거기에 기대는 거라고 할까. 어떤 환상들은 너무나 사실 같아서 그만 믿어버리게 되거든. 그럴 땐 나이가 열네 살이건 서른다섯 살이건 일흔 살이건 마찬가지지."

"할머니는 살면서 환상을 많이 품으셨어요?"

"너무 많이. 하지만 '그건 환상일 뿐이야'라고 깨달은 뒤 더는 실망하지 않는 때가 온단다."

"그게 언젠데요?"

"환상을 남발하고 남용하다 환멸만 남았을 때. 죄다 과거고, 더는 아무것도 심각하지 않을 때지."

"환상을 품으면 어떤 기분일까요?"

"행복하지, 너도 그러길 바란다."

"...."


[153p]

내가 로미오 생각을 하는 이유는 함께한 시간이 즐거웠고, 함께 나눈 대화가 여동생 문제에 대한 그의 갈등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 그 나이에 매니큐어 칠을 하게 해도 괜찮을까요?" 이에 대해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안될게 뭐 있어요?"

부모님은 내게 매니큐어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지만 나는 크게 상심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식당일에 치여 나의 감정이나 실존적 문제를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나중에 고생하지 않도록 바른 길로 나아가기만 원했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기를, 너무 일찍 남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않기를, 좋은 인연을 만나 당신들을 부모의 책임에서 영원히 해방시켜주기를. 나는 그렇게 했다. 복종했다. 바른길로 나갔고, 모범생이었으며, 남학생들의 관심을 끌지않으려 노력했고, 여생을 물질적 결핍없이 지내게 해줄 남자를 찾아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사는 것처럼 산 걸까? 유년기와 성년기 사이의 커다란 간극 사이에서 어느 쪽에 발을 들여야 할지 고민하며 안정망 없는 허공에서 전율하는 미친 듯한 방황을 겪어보았던가?


[157p] 로미오의 편지를 통해 감사한 마음을 전달받은 줄리에트.

나는 탈의실 구석에 버려진 이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우리 둘 중에서 누가 더 심하게 버려진 사람인지 모르겠다. 희한하게도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나는 엄청난 고독감을 느꼈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른 채 한참 동안 멀거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재활센터 분위기는 쾌적하다. 물리치료사들도 의욕적이며 때로 엄격하지만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심리치료도 조화롭게 병행하고 있다. 이따금 감정적 따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 번씩이나 넘어지는 바람에 의욕이 저하되는 경우에 말이다."발전은, 머릿속에 있는거예요." 나를 자주 담당하는 물리치료사 미셸의 말이다. 옳은 말이다. 내가 발전을 믿어야, 실제로 발전한다. 따라서 나는 믿는다. 철석같이. 여기저기 부러져 유리같이 약해진 나를 경험한 후에 말이다.



[203p] 저녁때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은 식당일을 접은 뒤 행복하고 조용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 프랑스 남부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다소 냉정한 성격이지만 날 사랑한다는 건 안다. 엄마는 아버지보다는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항상 나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은 로랑을 무척 맘에 들어하며 이상적인 사위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그가 눈앞에서 예의바르게 굴고, 내게 먹구름 없는 미래를 보장하는 사회적 위치에 있는 한 부모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부모님은 매년 석달 씩 태국에 가서 머물며 이국적 향취를 즐기다가, 기꺼운 마음으로 고국으로 돌아온다. 이제 부모님이 태국으로 떠날 날이 일주일 남았다.

"엄마?"

"그래, 줄리에트. 잘 지냈니?"

"네, 좀 힘들긴 해요. 인공수정 시술도 그렇고, 인력 충원이 안 돼서 병원일도 그렇고요. 스케줄이 숨 가빠요."

"사는 게 그렇지. 우리도 정말 미친듯이 일했단다. 너도 나중에 여유를 누리게 될거야."

...

나는 전화를 끊으며 엄마는 절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할머닌 정반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거울의 정반대편에 있다. 기욤은 요즘 서쪽에 있고. 로미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 텐데.

할 수 없지.

인생이 그런것을.


뭐랄까 이 페이지를 다시 읽다보니.. 줄리에트가 어떤 감정으로 세상을 대하게 되는지 가까운 사람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ㅜㅜ 대체로 가족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다보니 그사람의 반응이 맞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수정하려 하는것 같다..가족의 생각도 분명 틀릴 수 있는데, 관계의 강도가 강하다보니 나를 잘알고 나를 위한다는 생각에 빠져 그런 결론에 이르는 것 아닐까. 저렇게 힘든얼굴로 힘들다고 할때, 사는게 그렇지..라고 답을내버리고, 나중에로 여유를 미루는 불행한 사고절대 학습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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