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부동산에 처음 가봤다. 적은 예산에 맞는 집들은 정말 작고 낡았더랬다. 신축 기숙사에서 편히 지내다가 몇십년된 일본의 오래된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려니 어찌나 좁고 불편한지. 이사는 결혼하거나 강산이 변할때나 한번씩 하는 줄 알았는데, 난 그 해부터 십몇년동안 1-2년을 못넘기고 계속 이사를 다녔다. 교활한 중개업자도 많이 만났다. 그들과 싸울때면 일본어의 욕이 한국말만큼 찰지지않아서 아쉬웠다.
그래도 해를 거듭한 연습(?)덕에 인도같은 나라 빼고 웬만한 곳 어디에 가도 괜찮은 집을 구할 수 있는 깐깐한 임차인이 된거같다.
이번엔 홍콩이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돈많은 서양인과 벼락부자 중국인들이 부동산 투자를 한다는 소문의 그곳아닌가. 다시 학생때같이 좁은집에서 부대끼며 살아야하는건 아닌지 쾌적한 대만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약간의 걱정이 들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홍콩의 닭장같은 집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회사에서 소개받은 부동산업자들은 그들 특유의 태도가 있다. 외국인이라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지(맞는말이지만),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은 집을 계속 보여주거나, 예산이랑 너무 차이가 나거나 뭐 그런식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장소를 익히는데 도움이 되고, 이것저것 많이 물어볼 수 있어서 군말않고 따라다녔다.
첫날은 구룡지역을 돌아봤다. 새로 생긴 아파트단지는 기본 30-40층 높이에 수영장이며 클럽하우스등등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지만, 방이 엄청나게 좁았다. 방3개짜리라고 해서 보니 두번째 세번째 방에는 집에 있는 손님용 더블침대가 아예 안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차라리 방을 두개로 하지, 무리하게 방을 나눈 것같다는 나의 코멘트에 홍콩사람들은 식구대로 방은 필요한데 집값이 계속 올라가니 점점 사이즈가 줄어든다고했다. 홍콩아일랜드로 가면 더 작다고했다. 내 마음은 다시 대만으로 향한다.
그리고 키친옆에 붙어있는 도우미방은 진짜 너무 좁고 열악해서 한숨이 나왔다. 이런데서 사람을 재우다니, 창문도 없고 환기도 안되는 창고같은곳에 누우면 머리끝과 발끝이 벽에 닿을 정도로 작았다. 창문도없었다.이런 공간에 사람을 쑤셔박아놓고 집안일을 시키면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할말을 잃고 서있는 내게 부동산아저씨가 말했다. 여기는 메이드 구하기가 쉬워요, 한달에 얼마 안하니 필요하시면 소개시켜드릴게요. 난 고개만 끄덕이고 죄없는 아저씨에게 따지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홍콩아일랜드의 미드레벨이라는 곳에 갔다.35층짜리 아파트 전체가 한사람의 소유란다. 그래서 배부른 집주인은 화장실이나 키친이 오래되어서 내부수리가 필요해도 수리에 인색하고, 안고쳐도 사람이 계속 들어오기때문에 요구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했다. 나에겐 도움이 되는 정보지만 그런곳에 애당초 왜 데려오는건지, 아니면 계약을 성사시키고 싶으면 그런 말을 하지않는게 낫지않나 싶었지만 그냥 빙긋웃었다. 게다가 그 빌딩에는 개하고 가사도우미가 드나드는 전용 뒷문과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아이러니한 공간배분법이었다.
몇군데를 더 돌아본 후, 명함을 교환하고 또 연락하자는 말을 나누고 그와 헤어졌다. 아직 이른 오후 시간이라 평소같으면 로컬부동산을 찾았을텐데 둘다 의욕을 상실하고 그냥 동네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홍콩섬에 비치가 있다던데 가서 맥주나 한잔 하고오면 좋을 것 같다고 남편이 말했다. 마침 그날은 시내에서 데모가 한창이었기에 멋모르고 갔다가 멍청한 관광객이 얼떨결에 데모에 참가하는 꼴이 될까 싶어 그러자고했다.
구글맵으로 검색해서 미니버스를 타봤다. 시내에서 터널을 한군데 지나 20분정도 달리자 내가 아는 홍콩같지않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비치가 있는것도 의외였지만 터널하나를 두고 이렇게 분위기가 바뀐다는게 놀라웠다. 지하철이 없고 좁은 이차선도로를 따라 버스나 택시를 타고 들어가야 다다를 수 있으니 높은 아파트블럭이 빽빽히 들어선 오전의 풍경을 아직 이곳까지는 못가져온듯했다. 가슴이 탁 풀렸다.
리펄스베이 비치 근처의 레스토랑에는 홍콩사람들보다 서양사람들이 더 많았다. 자리에 앉아 호기심에 검색을 해보니 홍콩섬중에서도 렌트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란다. 거리상 시내까지 멀지않고 자연이 눈앞에 펼쳐지니 지하철이나 영화관이 없는 정도의 불편함이 오히려 부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나보다. 나라도 여유만 되면 저곳으로 가지않고 이곳에서 살고싶을 것 같았다. 열심히 근처의 아파트를 검색하다가 손목이 아파올 때쯤 고개를 드니 벌써 어둑해져있었다. 첫날의 일정치고는 나쁘지않았다며 서로를 다독이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해가 지고나니 길거리에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꼭 양명산 한자락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여행객이 된 느낌이 들었다. 아까 즐겁게 오후를 즐기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어리둥절했다. 길을 잘못들었는지 도보가 중간중간에 끊겨서 차도로 걸어야했다. 차가 매섭게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덥지근하고 가로등이 없어서 시야가 어두운데다가 아까 마신 맥주가 올라와서 온몸이 나른했다. 앞서가는 남편에게 “우리 그냥 택시타고 가자!!” 라고 뒤에서 소리지르는데 갑자기 남편이 놀란 얼굴로 나를 향해 달려온다.
그리고 말했다.
“거기 서봐! 저기에 돼지가 있어!!”
그리고 달려오는 남편의 뒷배경에 옆으로 쓰러진 오렌지색 쓰레기통과 안의 쓰레기를 파헤쳐먹고있는 엄청나게 큰 돼지 두마리가 보였다.
순간 지브리의 만화영화가 생각났다. 주인공 여자아이의 부모님이 돼지가 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생각에 미치자 무서워진 나는 남편을 버리고 소리를 치며 줄행랑을 쳤다-라고 남편은 말하지만, 난 그저 돼지가 되고싶지않아 최고속도로 뛰었을 뿐이라고 해명을 했다.
혹시 내가 그 순간 태국의 어느 시골마을이나 아빠 고향의 친척집을 지나가다가 돼지를 봤다면 그렇게 놀라진 않았을것이다. 그런데 홍콩의 번화함과 좁아터진 집들을 본 날, 20분거리의 장소에서 뚱뚱한 야생 돼지가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심장이 쫄깃해지고 엄청 빨리 뛰었다. 술이 확 깼다.
남편의 기다리라는 외침이 귀에 들어올 때쯤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멈추어 서서 오랫만에 깔깔거리고 웃었다. 돼지가 무서워서 도망가는 내 모습이, 그걸 쫓아오는 남편이, 우걱우걱 아직도 음식을 먹고 있을 돼지 두마리가 우스웠다.
야생돼지를 만났다.
홍콩의 첫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