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산 웃음 VS. 양식 웃음
가짜웃음과 타인의 웃음
울음소리와 관련된 이전 글 <대신 울어주는 사람...>에서도 예고드렸듯이 우리가 내는 감정의 소리 중 대표적인 소리는 웃음소리입니다. 미디어에서는 행복을 상징하는 효과음으로도 쓰이고, 예능프로에서는 웃기지 않을 것 같을 땐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서 요소요소 이미 녹음된 관중의 웃음소리(canned laughter)를 넣기도 합니다. 이거 가짜네? 조작 아냐?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웃음소리는 사실 누군가 먼저 시작하면 좀 편하게 다른 사람도 웃기 시작할 수 있다는 심리적 이론을 바탕으로 사용됩니다. 기계적으로 녹음된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건 편하게 웃기 위한 환경을 마련해 주거나, 웃어야 할 타이밍을 알려주는 '친절'로 볼 수도 있다는 거죠.
더 정확히는 '남들'의 의견을 기계적으로 만들어주는 겁니다. 길을 걷다가 한 사람이 위를 올려다보면 주변 사람들도 올려다봅니다. (실제로 저는 자주 하늘을 보는 터라... 오해를 많이 받지요) 뭔가 있다면 공통의 문제겠지만 아무것도 없다면(저처럼... 사실 저는 하늘 자체가 좋아서 보는데...) 하늘을 본 사람을 멀쩡한 지 확인차 한 번 더 보게 되죠. 우리는 타인의 행동, 말, 표현, 감정에 민감합니다. 특히 감정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극장에서 정통 연극이나 교향곡을 듣다가 어느 타이밍에 박수를 쳐야 하나... 고민할 대 누군가의 박수소리가 시작되면 금세 파도처럼 퍼져가죠. 같은 경험일 겁니다.
이거.. 자연산 웃음이에요?
그런데 때론 그 타인의 웃음, 사회 심리적 웃음이 나의 웃음과 맞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소수자를 놀리는 과격한 예능이나 입담을 듣다가 사람들이 웃으면 혼자 어색해지기 싫어서 따라 미소를 짓겠지만... 저렇게 폭력적으로 웃겨야 하나 하고는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남성들만 모인 장소에서 그들끼리는 큰 문제가 안될 성적 농담도 여성이 듣기엔 아주 폭력적일 수 있죠. 왜 그럴까요? 사실 웃음이라는 게 희귀합니다. 자연스럽게 웃는 요즘 표현으로 '찐'웃음을 찾기는 쉽지 않아요. '삶은 고통이다'라는 명제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웃음은 상황과 이야기, 대상과 화자 모두가 고려될 때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다 보니 어렵죠. 하지만 귀해서 그런지 웃음의 효과는 온갖 명약으로도 소개되고, 실제로 암환자나 치료를 위한 레크리에이션에서도 자주 사용됩니다. 안 웃겨도 일부러 '하하하~!'하고 모두 모여서(이게 중요합니다.) 웃는 영상들 보신 기억은 있으실 거예요.
하지만 이 귀하고 효과만점인 웃음을 늘 우연히 상황과 맥락에 따라 발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는 일부러 그런 상황과 맥락을 만들어서 웃음을 유발하려고 합니다. 개그 프로그램은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보다는 살이 많이 찐 뚱뚱한 개그맨, 얼굴이 못생겼다고 스스로 말하는 여성 개그우먼 등이 등장해서 다소 가학적인 모습을 연출하죠.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웃음소리에 떠밀려 잠시 웃다가... 좀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약점은 웃음거리가 되면 좀 아픈 거니까요.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기계가 먼저 선창한 웃음소리와 비슷한 마음이 없는 소리가 됩니다. 짧고 허망하게 공중에서 증발하죠.
하지만 진하고 깊은 웃음소리는 크지 않더라도 오래오래 숨소리를 타고 은은하게 퍼집니다. 그런 웃음을 주는 존재는 바로 동물인데요. 동물은 인간만큼의 사회성이나 사회심리적 효과를 알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온 국민이 '앓이'를 할 정도로 사랑한 팬더곰 '푸바오'는 친근한 사회성과 애교 덕분에 큰 사랑을 받았고 그만큼이나 큰 웃음을 줬죠. 가끔 웃음을 자아내는 좀 굼뜨고 실수 많은 행동들은 마음의 무장을 금방 해제했습니다. 이런 장면에서 '가짜 웃음 기계'는 필요 없었죠. 왜일까요?
어쩌면 푸바오의 존재처럼 웃음 중의 웃음은 '자연산 웃음'이어서 아닐까요? 일부러 가학하고 넘어지고 일부러 옆에서 크게 웃고 그렇게 만들어진 웃음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아마도 밝고 기분 좋은 웃음이 푸바오를 통해 얻어지게 했을 겁니다.
그래서 푸바오가 떠날 땐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연산 웃음, 찐 웃음 뒤에 찾아오는 슬프고 애틋한 감정, 눈물은 그 웃음만큼이나 맑았습니다.
웃음이라는 도구
영화 '조커'에 등장하는 광대 분장의 주인공의 행동엔 '웃음'이 많습니다. 그런데 참 기괴할 정도로 일부러 웃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슬픔과 고통, 또 무서운 사건들은 그 '웃음'의 의미를 정말 웃겨서 웃는 웃음이 아니라 공포로 바꿔버리죠. 웃음은 그냥 단순하게 웃음 하나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끔찍한 원수관계인 누군가가 상대방의 물 잔에 독극물을 타고는 웃는다면... 그 웃음을 '웃음'이라고 부르긴 무서우니까요. 나쁜 웃음소리 중에서는 '비웃음'도 있습니다. 곤경과 어려움과 비탄에 빠진 사람에게 '웃음'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만큼 잔인한 게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끔찍한 비난은 야유와 함성이 아니라 모두의 커다란 비웃음일지도 모릅니다. 상상 속이지만 생각해 보면 어떠세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야유와 웃음 둘 중 뭐가 더 잔인할까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저는 웃음이 더 무섭긴 합니다.
길고 짧은 웃음소리의 차이가 뭐가 더 진정한 웃음의 소리고 아닌가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아닙니다. 목소리도 나라별로 웃음소리의 특징도 다 다르니까요. 하지만 그 웃음이 나를 향한 포옹인지 주먹질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웃음, 억지로 인공으로 만들어내는 웃음은 조금은 주먹질의 성격이 녹아 있습니다. 그런 웃음을 모으고, 활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웃기네'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웃기는 인간이네'할 때 만약 소리 내어 웃는 다면 그 웃음소리는 혀를 끌끌 차며 '쳇'하는 소리와 다를 바 없는 웃음소리겠죠. 그때의 웃음소리는 가짜웃음을 만들고 사용하는 상대를 경멸하고 경계하는 소리일 겁니다.
사람들이 웃어주면 좋습니다. 물론 진심 어린 웃음 이어야죠. 그렇게 사람들을 잘 웃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성적표 한편엔 '유머감각이 좋음'이라는 선생님의 기록도 있었죠. 그런데 억지로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하면서 웃기고 싶지도 않고요. 그건 웃음소리가 아니라 '웃기고 있는 소리'를 만들어낼 뿐이니까요. 요즘 그런 소리... 자주 들리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