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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Aug 09. 2024

Essay<ㅊㅅ, 소통의 DNA>

 [Sound of Life]초등학생과도 소통할 수 있다. 위대한 초성

  라디오 방송은 소리 하나로 모든 걸 전한다. 그래서 글을 말로 전할 때, 눈에 보이는 않는 풍경과 감정까지 상상한다. 생방송 [On Air] 사인이 켜지면 첫 말의 초성을 내 뱉을 때 이미 그 말은 풍경을 갖는다. 경쾌하게 외친 ‘청취자 여러분!’의 초성 ‘ㅊ’은 전파의 ‘치익’ 소리와 닮았고, 어머니 몸속에서 처음 듣는 심장 소리와도 닮았다. 말과 글이 시작되는 첫 소리, 초성은 소통의 DNA를 품고 있다. 


 ㅂㅂㅂㄱ

  세종대왕께서도 (훈민정음의)‘어린 백성’을 생각하며 초성을 만들고 발음하실 때 이 DNA를 느끼셨을 것이다. 그 첫 초성의 날로부터 육백년이 흘러도 끄떡없이 한글이 우리를 이어주는 말과 글이 된 이유 역시 DNA가 있기 때문. 특히 요즘의 (주로 초등학생인)‘어린 백성’들은 모음과 받침이 없이 초성만으로도 긴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한글사용 스타일은 ‘휴먼급식체’라는 이름으로 진화했다. 한글의 위대함에 대해선 정말이지 ㅂㅂㅂㄱ(반박불가)!


 ’, ‘ㅇㅇ’, ‘’, ‘

  그런데 이 초성 소통은 남녀노소 없이 흔하다. 누군가의 물음에 답으로 사용되는 ‘ㅇ’ 혹은 ‘ㅇㅇ’은 그 초성에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다. ‘ㅇ’의 상황(무척 바쁜?)이나 ‘ㅇ’을 보낼 사람과의 관계(너한텐 모음이나 받침정도는 생략해도...되겠지?)까지. 단순한 귀찮음인 경우가 다수겠지만 초성을 보낸다는 건 가끔 시처럼 무수한 재창조의 해석을 불러온다. ㅇㅈ?(인정?)


 ㅎㅎ와 하하

  주변에 물어보니 가장 자주 쓰는 초성은 ‘ㅎ’이었다. 미지근한 농담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딱’ 이며 그 개수에도 미묘한 의미를 담을 수도 있다나? 생각해보니 ‘ㅎ’대신 ‘하’, ‘허’, ‘흐’는 어색하다. 누군가 나의 농담에 ‘하하’라고 답한다면...? 답을 보낸 사람의 속마음을 궁금해 하며 문자 창을 표류할 것 같다. 


 ㄱㄹㅇ’   

  말을 더 작게 분해하면 원소처럼 더 작은 말이 나올까? 말의 가장 작은 원소는 블랙홀 같은 침묵이 아닐까? 전하고 싶었지만 기어이 전하지 못했던 말, 빈자리에 무수히 쏟아내던 어둠속 별 같던 침묵의 말. 그런 침묵보다는 시끄러운 일상의 말을 많이 듣는 요즘, 불쑥 자라서는 나와 다른 말투를 쓰려 노력하는 사춘기 딸에게 답 문자를 받기 가장 좋은 말 걸기가 ‘초성’이라는 걸 발견하고는 뛸 뜻이 기뻤다. 그래! 우리 다시 예전처럼 신나게 수다를 떨자! 수시로 퇴근길에 말을 걸어본다. ‘ㅇㅃ ㅈㄱ ㅇㅅㅂㅇ ㅇㅇㅇ’ 수수깨끼처럼 던진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는 이 ‘어린 백성’! ‘아빠 지금 일산병원 앞이야? 빨리 와 엄마가 밥 먹자고 해’, 나는 사춘기 딸과의 대화까지 가능하게 해주신 세종의 위대한 한글에 눈을 뜬 진정 ‘어린(어리석은) 백성’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창 예민한 사춘기 딸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 대화창을 열고 조심스레 초성을 고른다.

  하지만 때론 보낸 사람의 초성과 받는 사람의 초성이 전혀 다를 때도 있다. 그냥 ‘변신’을 해버리는데, 애교를 목적으로 아내에게 ‘ㄱㄹㅇ’라고 보내면 ‘또 누가?’라던가 ‘어디가?’라는 실용적인 답이 돌아온다. 물론 나는 ‘그리워’라고 애교를 떨었고 아내는 ‘가려워’ 혹은 ‘괴로워’로 읽었을 것이다. 난 아내에게 늘 가렵거나 괴로운 사람이었구나. 이젠 엄살은 그만 부려야겠다. 그래도 다행이 ‘ㅅㄹㅎ’는 ‘이상한 변신’을 하지 않고 내 마음을 전했다. ㅎㅎ.


  ㅇㅁ

  초성을 곱씹고 고르고 써보면서 이 소통의 DNA는 쓸수록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소리로서의 DNA는 의미까지 함께 품고 있었다. 초성 ‘ㄱㄹㅇ’는 ‘그리워’, ‘가려워’, ‘괴로워’... 등의 말이 될 수 있다. 모두 ‘참기 힘들다’는 공통의 의미를 DNA로 갖는다. ‘ㅅㄹ’도 마찬가지 ‘사람’, ‘사랑’, ‘시련’, ‘설렘’... 등 어쩌면 ‘ㅅ’과 ‘ㄹ’의 ‘삶’이라는 이치를 간직하는 것 같았다. 초성을 생각하며 문득 ‘ㅇㅁ’을 써본다. 삶의 가장 오랜 그리움. ‘엄마’. 동그라미 네모 같은 이 초성은 때론 엄마를 닮은 동네 가게의 ‘이모’들로도 쉽게 바뀐다. 라디오를 켜면 무수한 초성들이 별처럼 떠오른다. ‘어린 백성’들은 별자리에 저마다의 의미를 그리고 나눈다.


월간에세이 2020년 3월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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