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nd of life] 울음은 세상 만물의 공용어
2012년 가을, 국립국악원 발행
강물처럼 흐르는 '만물공용어‘ 아쟁산조!
울음은 세상만물의 공용어
사람이 태어나 처음 배우는 유일한 언어는 ‘울음'이다. 슬픔이나 괴로움의 표현 아니라.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일한 언어, 말과 글 이전에 언어가 울음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새가 운다. 한 여름 매미가 울고, 매서운 겨울바람도 운다. 모두 슬퍼서 우는 것인가? 단지 그들의 유일한 언어가, 소통의 방식이 ‘울음'이기 때문이다. 울음 은 사람과 자연과 세계가 함께 사용하는 만물공용어, 유일한 공감의 언어다.
우리 악기 아쟁은 울음의 악기이다. 특히 산조아쟁은 인간이 가진 울음을 가장 가깝게 공감하면서 또한 우리가 닿지 못한 울음의 세계까지 표현한다. 태고의 울음을 품은 아쟁은 가로의 줄을 세로의 활로 가로지르며 세상에 그어내는 감정의 좌표이다. 그 좌표 위에서 역시 가로의 세상 위에 세로로 서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아쟁산조는 닮은 꼴이다. 아마도 먼 훗날 세상의 가로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누워 침묵하는 날 전까지 삶은. 아쟁은 이 감정의 좌표 위에 무수한 곡선을 그리며 함께 울 것이다.
아쟁산조는 삶의 그늘이다.
이 아름다운 곡선이 그려낸 삶의 방정식은 울지 못하는 시대, 눈물과 슬픔은 숨겨야 할 것이 되어버린 감정의 사막에서 감로수를 찾는 길을 알려준다. 기쁨과 웃음이 대량 생산되는 뙤약볕의 현대사회에서 우음 은 삶의 그늘이 되어준다. 그 그늘 아래에서 맺히고, 막힌 것들이 풀리고 흐른다. 그렇게 우리 음악이 된다. 아쟁이 운다. '울지 마라'가 아니라 맘껏 '울어라' 라고 하며 우리가 잊었던 울음의 언어를 되살려주며 아쟁이 운다. 그 울음을 거쳐서 아파야 할 것
들이 제대로 아플 수 있다. 비로소 이 공감의 시간을 통해 희로애락의 4계절이 만들어진다. 아쟁산조는 그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음악이다.
아쟁산조는 강물이다.
산조는 한 사람이, 한 생을 통해 완성한 독주곡이다. 그냥 삶이라고 부르면 그대로 어울릴 음악 산조. 아마도 삶의 곡선과 산조의 곡선은 놀랍도록 비슷한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곡선 중에서 아쟁산조는 특히 '강물‘ 의 곡선과 닮아있다. 서두름 없이 마음껏 굽어 흐르는 아쟁산조는 곡선의 음악이다. 강물의 음악이다. 목적지에 가는 것 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비옥한 농토의 갈증을 채우려 맑은 생명수로 제 몫을 나누며 천천히 흐르는 강물처럼, 아쟁산조는 공감하듯 느슨하게 때론 굽이치며 마음을 흐르는 강물의 산조, 강물의 음악이다.
그래서일까? 아쟁전공자 1호인 이태백과 그의 스승 박종선이 빚어내는 아쟁산조는 맺혔다가 풀리는 사계절 강물 같은 음악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나가 맺히고 다시 풀리는 것. 그것은 생명의 탄생과도 같다. 하나가 비워질 때 비로소 그 텅 빈 곳에 새로움이 채워질 수 있는 것, 어미와 자식처럼 아쟁산조는 스승이 맺어놓고 다시 풀어내며 흐른 텅 빈 물줄기를 새로운 세상, 시간, 감성을 공감하며 흐르는 제자의 맺어놓고 풀어내는 가락으로 흐른다.
(사진 : 2023년 5월 한강 행주산성 부근, 김틈)
서용석과 서영호가 나란히 눈을 맞추었을 아쟁산조병주가 그렇고 윤윤석의 아쟁과 윤서경의 징이 멀리서 같은 진폭으로 울었을 아쟁시나위가 그렇다. 아쟁산조의 음악은 그렇게 강물에 기대어 수천 년을 다른 모습이지만 같은 감성의 유산을 공감하며 살아온 역사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말 이전의 언어로 우리를 소통하게 한다.
울음, 울림이 되다!
울음을 과학적으로 바라본다면 아마도 일정한 진폭을 가진 곡선형태의 주파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첨단을 달리는 디지털 시대는 이런 곡선이 아니라 0과 1의 정보가 구현하는 99.999%의 모방을 추구한다. 가장 진짜와 가깝지만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는 디지털, 어쩌면 그런 시대에 인간은 0과 1의 디지털이 아닌 부드러운 아날로그의 곡선에 더 목말라 있을지도 모른다. 모방이 될 수 없는 진짜 삶의 모습이 바로 그 곡선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더욱 건조하고팽팽한 직선의 모습으로 미래를 향해 질주할 때, 잠시 멈춰 서서 아쟁산조를 들어보자 투박한 개나리 활도, 말총으로 잘 다듬어진 활도 모두 팽팽한 직선이 아니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울음을 운다. 그 울음이 정겹고 편안하다면 나는 아쟁의 울음을 함께 울 줄 아는 강물 같은 사람이다. 그 순간은 울음이 비로소 '울림‘으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소리굽쇠가 서로 닿지 않고서도 소리만으로 함께 몸을 떨 수 있듯이 아쟁산조의 음악은 진양에서 중모리로, 중중모리, 자진모리, 다스름까지 둥글게 굽이치는 삶과 함께 울림! 사는 것의 적적함과 아픔을 알아주고, 울지 못하는 자들을 울게 하는 해소의 신내림이다!
아쟁산조가 찾아낸 진심의 언어!
뉴스를 보다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스포츠를 보다가 혹은 훌쩍 떠난 사람의 빈 공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운다. 그 울음에는 고마움, 미안함, 감격, 슬픔, 고통 등 가장 깊은 진심이 담겨있다. 누군가에게 배운 표현이 아니라 가장 찬란한 유산으로 내 문화적 유전자 속에서 전해 내려오는 숙명 같은 진심의 언어인 것이다. 진심의 언어 울음! 이제 라디오를 켜고, 공연장에 가서 아쟁산조를 만나보자. 눈물이 금지된 시대, 진실의 문을 열어줄 울음이 기피되는 시대, 웃음과 재미의 대량생산이 감성의 가뭄을 만든 이 시대에 내가 아직 공감하지 못한 눈물을 울음의 언어를 되찾아 줄지 모른다.
가을 초입의 하늘을 꿈꾸는 저 강물 같은 아쟁 소리에 문득 눈가가 젖는다.
* 세계의 공통언어는 자멘호프가 고안한 '에스페란토'어. 하지만 '만물공용어는 샤람만이 아닌 자연과 시간까지도 공유하는 공통언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一